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히 흘러가는 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었다 우산을 쓴 내가 그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빗속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개천가에,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긴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왼쪽 어깨에 기대 놓았던 우산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면서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오른편에 둔 우산처럼 젖어 가는 나는,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그러므로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받아 내고 있는 개천을 가로지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저것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에 잠겨 있고 난데없이 이건 또 웬 지옥인가 싶었다 어떤 느낌은 참 난데없다. '난데없다'는 갑자기 불쑥 나타나 그 출처를 알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그야말로 그렇다. "난데없이 이건 또 웬 지옥인가 싶었다"라니. 그런데 시를 찬찬히 따라 읽어 가다 보면 그 사연을 조금은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물살은 급해졌고. 나는 그런 "개천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위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말이다. 게다가 그 새는 "날개도 부리도 없"다. 그러니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냥 지나쳐 왔는데, 그런데 왠지 자꾸 마음이 불편하다. 혹시 그 개천가에 서 있던 게 날개를 다친 새였다면, 아니 실은 그 빗속에 "긴 새"처럼 어떤 사람이 우두망찰 서 있었던 거라면, 아니 아니 그보다 그 사람이 다급하게 흐르는 개천 속으로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거라면, 정말 그런 거였다면, 정말 그랬다면... 어쩌면 단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 새를 아니 그 사람을 향해 단 한마디만 외쳤더라면, 우산 따위야 내던지고 그 개천가를 향해 달려갔더라면. 이 알량한 우산 밖의 저 지옥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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