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詩] 빛, 돔구장 안에서/우희숙

달리는 바람이다 바람에 부러지는 가지다 가지에서 소낙비처럼 떨어지는 버찌다 버찌를 쪼아 먹는 새다 먹다가 시시때때로 우는 뻐꾹새다 울음을 매단 공중이다 울음을 잘라 내는 공중이다 숨죽인 바람이다 바람을 돌돌 말아 똬리를 튼 뱀이다 똬리에 앉아 졸고 있는 개구리다 멍한 눈빛이다 한낮의 잠이다 죽은 용수철이다 걷고 있는 바람이다 씨앗을 문 개미의 행렬이다 죽은 개미를 꽃잎을 물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상여다 꽃술을 들고 상여를 쫓아가는 무당벌레다 뛰는 바람이다 팥 순 먹고 쏜살같이 도망치는 고라니다 고라니의 긴 다리다 긴 목이다 고라니를 쫓아 날뛰는 개다 울부짖는 소리다 사그라지는 소리다 멈춰 버린 바람이다 양철 지붕 위 쉬는 바람이다 감자 캐다 퍼져 버린 너다 땀에 젖은 너의 등짝이다 휜 등짝 아래 까맣게 탄 얼굴이다 알 수 없는 통증이다 흐르지 않는 냄새다 
 ■ 참 유려하다. 물 흐르듯 흐르는 문장이란 아마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달리는 바람"이, '가지'가, '버찌'가, '새'가, '뻐꾹새'가, '공중'이, 그리고 마침내 "양철 지붕 위 쉬는 바람"까지 한 줄로 거침없이 엮이는 문장들을 읽고 있자면, 신작로를 따라 바람결에 잎잎이 연달아 나부끼던 플라타너스들이 생각난다. 아름답다고 적을 수밖에.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대부분 단문으로 이루어진 이 시 곳곳에 툭툭 박혀 있는 "통증"과 관련된 시어들, '부러지다', '떨어지다', '울다', '울음', '숨죽이다', '똬리', '멍하다', '죽다', '상여', '날뛰다', '울부짖다', '사그라지다', '멈추다', '쉬다'에 눈길을 두고 있자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고 거대한 고통의 원 하나가 떠오른다. 그 안에 "감자 캐다 퍼져 버린" "땀에 젖은 너의 등짝"이 있다. 아마도 "알 수 없는 통증"이란 그 정도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맥락일 것이다. 아름답고 또한 지극히 고통스러운 시다. 문득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그 땡볕이 내리쬐던 감자밭이 일렁인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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