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를 샀다.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있었지만 대파를 샀다. 굵고 파랗다. 단단하고 하얗다. 맵고 끈적끈적하다. 대파다. 흙을 털고 씻었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큰 칼을 들고 대파를 썰 차례다. 억울하면 슬픈 일을 생각하면 좋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대파니까. 시장바구니에 삐죽 솟아오른 것이 대파였다. 설렁탕도 골뱅이도 없이 대파를 씹는다. 미끈거리고 아리다.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대파여서 뿌듯하다. 종아리 같은 대파였으니까. 파밭의 푸른 기둥이었으니까. 뿌리를 화분에 심으면 솟아오르는 대파니까. 허공에 칼처럼 한번 휘둘렀으니까. 대파하고. 파꽃이 피고 지면 알게 될까. 대파를. 뜨거운 찌개에 올려 숨죽인 대파의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까.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시인들은 가끔 참 엉뚱하다. 눈앞에 대파를 떠억하니 놓고도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파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아니고, "굵고 파랗"고, "단단하고 하얗"고, "맵고 끈적끈적하"고, 씹으면 "미끈거리고 아"린 것, 그런 게 대파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런데 '엉뚱하다'라는 단어는 좀 부정적인 맥락에서 자주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이다.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대파를 이해해 온 상식적인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더듬어 보고 입으로 맛을 느낀 바들이 과연 그 대상의 본질에 해당할까? 더 나아가 우리가 이미 정해 놓은 어떤 분류 체계(대파, 중파, 쪽파, 재래종 파...)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대파'를 '가까이 알고 지내는 누군가'로 바꿔 놓고 이 시를 곰곰이 읽어 보면 여러 생각들이 들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아내를, 자식을, 친구를, 선후배를, 그리고 이웃을 "어떻게" 만나 왔을까? 내가 그들을 정말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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