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사진=홈페이지 캡처, 아시아경제 DB]
최근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노벨상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초의 노벨상은 노벨이 사망한 5년 뒤인 1901년 12월 10일에 수여됐으며 의학, 물리학, 화학, 문학, 평화 등의 분야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다 1969년 경제학상이 추가되면서 현재의 6개 분야로 확정됐다. 이중 순수 과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는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가 선정한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역대 수상자 중에는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물리학상에서는 지난 1915년 25세의 나이에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이가 있다.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다. 영국의 로런스 브래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상자로 선정됐다. 1932년 물리학상을 수상한 베르너 하이젠베르그도 31살에 수상의 기쁨을 맛봤다.또한 물리학상은 노벨상에서 최초의 여성 수상자를 배출한 분야이기도 하다. 1903년 '퀴리 부인'으로 널리 알려진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들 부부는 라듐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시상식에서 피에르 퀴리는 이렇게 말했다. "라듐은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하지만 피에르 퀴리는 3년 뒤 불의의 마차 사고로 갑자기 숨졌다.마리 퀴리는 화학상 역대 수상자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다. 그는 1911년 화학상을 수상하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한 유일한 인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 수상에는 우여곡절도 있었다고 한다. 마리 퀴리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1911년 한 신문에서 그와 프랑스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 연인 관계라고 보도한 것이다. 마리 퀴리는 남편 사후 혼자였지만 랑주뱅은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게다가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가 아끼던 제자였다. 랑주뱅과의 관계가 불거지자 마리 퀴리는 1911년 노벨위원회로부터 수상을 거절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며 시상식에 참석했고 랑주뱅과는 헤어졌다. 한편 화학상 수상을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1938년 화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독일의 생화학자 리하르트 쿤은 나치의 압력 때문에 2차 대전 후에 상을 받았고, 1939년 화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아돌프 부테난트는 수상을 포기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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