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스토리 - 사랑은 진지전이다, 자기를 팽개치고 홀랑 넘어가면 백전백패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2007년작 장윤현감독 영화 '황진이'의 송혜교.
이제 황진이의 남자들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황진이는 어머니의 실패한 인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남자와 눈이 맞아 청춘을 걸었다가 비참해지는 걸 봤다. 그래서 얻은 교훈 1호. 남자에 대한 철저한 불신. 작업을 할 때 하는 달콤한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레짐작으로 겁부터 먹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남자가 그리워하면 나도 그리워한다.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황진이의 사랑 게임은 진지전(陣地戰)이다. 자기 지역 다 팽개치고 넘어가지 않는다. 가장 쪼다같이 당한 사람은 벽계수이다. 온 나라에 황진이의 명성이 퍼지자 왕실의 종척이었던 그는, 이 멋진 기생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 도도한 여자가 분명 퇴짜를 놓을 듯 하니 함부로 데이트 신청을 할 수가 없다. 유명한 시인이었던 손곡 이달이 그의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빙그레 웃더니 이달이 말한다. “공이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예. 그러리다.” 벽계수가 손곡의 자문을 구한 까닭은 황진이와 손곡이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허균의 가문이 그 중간에 끼어있다. 허봉, 허난설헌 자매의 스승이 손곡 이달이었고, 허봉의 아버지인 허엽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다. 화담과 황진이가 인연이 있으니, 결국 손곡과도 닿아있다고 봐야 한다. 손곡은 황진이의 ‘깊은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거문고를 맡겨서 뒤따라 걷게 하십시오. 황진이의 집을 지나가셔서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를 타고 계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겁니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서 빨리 말을 타고 떠나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따라올 겁니다.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성공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것일까. 손곡이 황진이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녀에게 사랑은 게임이니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별로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무관심으로 당겨야 한다. 거문고를 타며 술을 마시는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황진이는 당신이 궁금해질 것이다. 그런데 손곡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코치해주지 않았다. 황진이가 빼어난 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벽계수는 그대로 했다. 과연 황진이가 따라왔다. 그는 이제 됐구나 싶어 달이 훤한 취적교 위로 말을 몰았다. 그때, 조선의 베테랑 악사도 입을 딱 벌렸던, 신이 내린 목소리로 시조 창이 흘러나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노래도 노래거니와 가사가 말발굽을 세운다. 푸른 산 속에 흐르는 푸른 계곡물아, 잘도 흘러간다고 졸졸거리지 말아라. 푸른 바다에 한번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오려면 기회가 없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꽉 차 있으니 놀다 좀 가시오. 벽계수와 명월을 맞춘 천의무봉의 은유이다. 어이 벽계수씨, 쉬었다 가세요. ‘취한 오빠’의 팔을 잡는 무뚝뚝한 호객(呼客)도 언어 몇 개가 초간장을 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절절한 유혹이 된다는 걸 황진이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리야 이 시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감동’이 줄었지만, 당시 벽계수는 처음 듣는지라 영혼의 뒤통수를 치는 사이렌의 노래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손곡의 말을 잊어버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그때 나귀가 취적교를 다 간 난간에서 비틀거린다. 벽계수는 땅에 떨어져 무심한 표정으로 일궜던 카리스마를 바닥에 처박고 만다. 황진이는 껄껄 웃으며 팔짱을 끼고는 돌아선다. 한 소리 툭 뱉지 않았을까. “그대는 명월에 계수나무 심을 생각 마시고, 그냥 쭈욱 흘러가는 게 좋겠소.” 이 시조가 19세기의 자하 신위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7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해놓았다. 靑山影裏碧溪水 容易東流爾莫誇청산영리벽계수 용이동류이막과 一度滄溟難再見 且留明月影婆娑일도창명난재견 자유명월영파사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쉽게 동쪽으로 흐른다고 너 자랑마라한번 바다에 닿으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명월에 머무르면 그림자가 춤추리라 솔직히 이 한시는 당시 최고의 시인 자하답지 않다. 황진이의 군더더기 없는 시조를 버려놓은 느낌이 있어 살짝 아쉽다.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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