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詩] 받아쓰기/신미나

아버지 마침표, 어머니 마침표, 내가 부르는 대로 엄마는 방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쓴다 연필을 쥔 검지가 작은 산 같다 나는 받침 없는 글자만 불렀다 공책 뒷장에 눌러쓴 자국이 점자처럼 새겨졌다 여름밤의 어둠은빛이 밀어낸 지우개 가루연필 끝을 깨물었을 때연필심의 이상한 맛을 혀로 느끼듯이엄마는 자기 이름을 쓰고는 천천히 지워 버렸다 
 순희는 친구들이 많았을까?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였을까? 순희는 고무줄놀이를 잘했을까? 공기놀이는? 순희는 학교 갈 때 어떤 길로 다녔을까? 순희 엄마는 순희 점심 도시락 반찬으로 무얼 싸 주셨을까? 순희는 예뻤을까, 착했을까, 혹시 심술궂지나 않았을까? 순희는 동생들하고 잘 놀았을까? 숙제는 꼬박꼬박 했을까? 아님 숙제야 너 혼자 놀아라 그러고 마냥 놀았을까? 순희는 국어를 좋아했을까 산수를 좋아했을까? 순희는 어떤 색을 좋아했을까? 그리고 누굴 좋아했을까? 순희는 꽃을 좋아했을까, 나무를 좋아했을까? 그럼 무슨 꽃, 무슨 나무? 만날천날 먹어도 또 먹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순희는 산타 할아버지를 믿었을까? 밤마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순희는 장래 희망이 뭐였을까? 순희는, 음, 그리고 순희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참 궁금해졌다. 순희가. 순희는 내 엄마 이름이다. 채상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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