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를 훔친 프로메테우스

빈섬의 '낱말의 습격'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교수는, '깊다'라는 개념이 동양 고유의 사유체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양의 깊이 개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를 주로 의미하지만, 동양은 '산이 깊다'는 표현에서 보듯, 앞에서 뒤로 멀리 떨어진 것도 깊이로 인식한다는 얘기였다. 그에 따르면 서양인은 '심산(深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깊다'에 해당하는 영어 형용사 '딥(deep)'은, 동양에서 생각하는 '깊다'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딥'이란 말은, 앞에서 뒤로 나아가는 깊이도 표현할 수 있다. 딥 마운틴(deep mountain, 심산)은 드물게 쓰이는 편이나, 깊은 상처나 깊은 공간같은 표현은 자주 쓴다. 또 여러 줄로 늘어선 것도 깊이로 표현하며, 짙은 색깔, 깊은 호흡, 낮은 소리, 깊은 잠이나 혼수상태, 강한 감정 따위도 '딥'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감정이나 지식 또한 '깊이'라는 잣대로 저울질하며 어떤 상태에 푹 빠진 것이나 본심이나 내면을 숨기는 것 또한 '깊이'의 개념으로 붙잡아낸다.

영화 '아이로봇'의 한 장면.

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치열한 바둑대결'을 간 졸이며 지켜볼 때, 우리 마음 속에 가만히 들어와 앉는 '낱말 하나'가 있었다. 알파고를 만든 회사의 브랜드인 '딥마인드' 말이다. 딥 마인드. 기계를 만드는 회사가 인간의 고유한 자부심인 '마음'을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도 고약한데, 거기다가 '딥'이 붙어 있다니... 그냥 하찮은 판단에 쓰이는 마음이 아니라, 심오한 내면을 의미하고 있는 듯해, 어쩐지 으스스했다. 이 회사는 영국의 데미스 허사비스(1976- )가 2010년 런던에서 창업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 기업으로 원래 사명은 '딥마인드 테크놀로지'였다. 구글이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면서 이름을 아예 '딥마인드'로 바꿨다. 이런 브랜드 전략 속에도 구글의 야심이 숨어있다고 봐야 할까.아까 사전적 의미의 '딥'에서 마지막에 등장한, 감정의 깊이와 지식의 깊이, 어떤 상태에 푹 빠진 것, 그리고 본심이나 내면을 숨기는 그 깊이를 '딥마인드'사의 알파고는 생생히 혹은 섬뜩하게 보여줬다, 인공지능이니 '머리'만 하나 단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가슴'까지 지니고 있는 기계를 꿈꾸는 것이 딥마인드이다. 분별과 판단과 감정까지 기계 속에 불어넣을 수 있다는 그 자신감. 인간의 '깊이'를 훔쳐내 기계에게 심겠다는 생각은, 신국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한 프로메테우스 이후로 문명사의 거대한 특이점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임에 틀림없다.우리가 알파고를 처음에 얕본 것은, 그것의 '딥러닝'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딥러닝은 단순한 연산의 축적이 아니었다.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 사물을 구분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두뇌의 작동 방식을 흉내내, 컴퓨터가 문제를 분별하고 판단을 내리는 '스스로 학습능력'을 지니도록 한 것이다. 데이터를 연구해 저 혼자 공부하는 기계. 그것이 '깊은 학습(deep learning)'이다. 이것은 우리가 대체로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해온 고도의 통찰이나 깨달음이 기계로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섭지 않은가.알파고를 만나기 2년전, 2014년 3월에 페이스북은 '딥페이스(deep face)'라는 얼굴인식 알고리즘을 공개해 충격을 준 적이 있다. 페북에 얼굴 사진을 올리면 이 '해결사 프로그램'이 사진의 주인공을 97.25%의 정확도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사람이 육안으로 타인을 구별해내는 정확도가 97.53%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사람과 다름 없는 수준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이 알고리즘은 얼굴에 67개의 점을 찍어 그 특징을 파악해낸다. 두 눈 사이의 거리, 코의 길이와 너비, 턱선의 길이 같은 것을 수치로 분석한다. 그 숫자들을 데이터로 활용해 페북이 보유한 방대한 양의 사진 중에서 비슷한 얼굴을 집어내는 것이다. 측면 사진은 어떻게 할까. 컴퓨터는 얼굴의 주요 부분을 분석해 3D그래픽으로 재구성하고 그 중에서 정면 사진의 특징을 추출해 비교한다.딥페이스라... '깊은 얼굴'은 뭘까. 얼굴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복잡다단한 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표정이 지닌 깊이를 읽어내는 기계의 속내를 의미하는 듯 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그 표정 뒤의 깊이를 기계가 알아채는 것까지 염두에 둔 것일까. 요즘은 '딥(deep)'이 붙은 낱말만 봐도 괜히 심란해진다.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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