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그림의 발견' - 1월23일 타계한 불멸의 화가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암청색 골짜기(피오르)와 도시 위로피와 불의 혀가 있었다나는 불안으로 떨면서 거기 서있었다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무한의 비명을 느꼈다There was blood and tongues of fire above the blue-black fjord and the city ... I stood there trembling with anxiety and I sensed an infinite scream passing through nature.에드바르트는 뭉크(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는 그의 그림 '절규(1893년작)'가 탄생하게 된 상황을 시로 남겼다. 그는 친구 둘과 어떤 다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약간 우울함을 느꼈다고 한다. 까닭없이 몰려오는 피로감으로 교량의 난간에 기대 섰다. 그는 대자연의 거대한 비명을 느끼면서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스러워 했으나 친구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서른 살에 그린 이 작품 하나로 그는 인류사에 영원한 '호러 화가'가 되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는 무엇을 그토록 불안해 했으며 무엇에 그토록 절규했을까. 생애 내내 고통과 침울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81세까지 살며 유럽의 거장으로 인정받았던 그는 '노르웨이의 영혼(soul of Norway)'으로 불릴 만큼 북유럽 삶의 실존을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에 등장하는 피오르(골짜기)는, 너무나도 노르웨이적인 풍경이다.꿈의 한 장면이었을까. 정신쇠약이나 삶의 피로가 만들어낸 끔찍한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허기진 붓끝이 만들어나간 그 끝에서 대자연의 처절한 진상을 목격한 것일까. 15세기 조선의 안평대군은 꿈에서 '지상낙원'을 발견하고는 화가 안견을 시켜 그림으로 남겼고, 이후 그가 그토록 도피하고 싶었던 현실의 오라에 묶여 죽어갔다. 20세기 초반의 뭉크는 노을진 저녁답 소용돌이치는 붉은 하늘과 검푸른 골짜기들에서 '지상지옥'을 발견하고 미칠 듯한 비명의 감당할 수 없는 데시벨을 그림으로 남겼다. 절규는 그에게 절망의 생을 건너가는 필사의 아우성이었고 결국 치명적인 공포를 이겨내려는 생의(生意)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그 공포를 비싼 돈을 치르며 사들인다. 2012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절규’가 매물로 나왔고 1억1992만달러(1355억원)에 팔려 역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깼다. 이 작품은 1893년작보다 2년 뒤에 나온 파스텔 버전이다. 뭉크를 절규로 이끈 그의 생의 회로 속으로 들어가보자. 다섯 살 때(1868년) 결핵을 앓던 어머니의 죽음은 질식할 것 같은 삶의 시작이었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는 상처(喪妻)에 절망한 나머지 오직 종교에만 매달렸다. 신경질적이고 사납게 변했다. 어린 뭉크에게 집 주위를 여전히 떠도는 어머니를 환기시키며 끝없이 꾸짖었다. 아이는 환영(幻影)에 시달렸다. 그의 어린 여동생도 정신병 진단을 받았다. 9년 뒤(1877년) 누나 소피에도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다. 남동생 안드레아는 결혼한지 몇 달 안되어 죽음을 맞았다. 뭉크는 그의 어린 날을 이렇게 말했다. "공포, 슬픔,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내 곁에 서 있었다. 병약함과 정신병, 나는 그 두 가지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 같다."아버지는 아들이 기술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취향을 타고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1881년(18세) 예술학교에 진학한다. 화가 프리츠 탈로를 만나게 되는 것은 이 학교에서다. 탈로는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파리로 보낸다. 파리에서 탈로의 형수인 '밀리'를 사랑하게 된다. 8년 간의 연애는 그에게 깊은 환멸을 남겼다. 여자란 무엇인가. 그에겐 마돈나이자 메두사로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갱과 고흐, 로트렉을 만나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1889년(26세), 부친의 죽음 이후 그는 가족의 생계비를 대느라 허덕였다. 우울증이 왔고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런데 스물 아홉 살 때(1892년) 독일에서 그를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베를린 미술협회 개인전에서 그는 55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독일 언론들과 예술가들은 침울하고 불편하며 어둡고 괴이한 그의 그림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혹평이 쏟아졌고 미술협회에선 이례적으로 전시 중단 찬반투표까지 했다. 그의 야심찬 전시는 8일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언론들은 이것을 ‘뭉크사건(Munch Affair)'이라 불렀다. 이 일 이후 그는 오히려 베를린에서 유명세를 탔고, 그는 4년간 그곳에 눌러앉아 저 굴욕적인 기억과 질식할 것 같은 내면의 공황을 칼을 갈듯 끝없이 스케치하고 있었다. 그 연작들을 '생의 프리즈(frieze) - 삶, 사랑, 그리고 죽음의 시'라고 이름 지었다. 프리즈는 건물 외벽 지붕 바로 아래 띠처럼 두르는 좁은 벽 장식을 말하는데, 생의 만화경(萬華鏡)같은 뉘앙스일 것이다. 그 만화경의 중심에 '절규'가 있었다. '절규' 이외에 '마돈나' '흡혈귀' 등도 그 시리즈의 대표작들이다.
'절규'는 누구를 향한 절규였을까. 몸의 형태를 S자 모양으로 비틀고 입은 있는대로 벌린 채 부라린 눈으로 경악하는 그 모습은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들은 것일까. 대자연 속에서 터져나온 절규는, 인간의 비극적 조건과 참담한 생의 진상을 정면으로 마주한 공포였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까지 이어진 성장잔혹사와 가족불행사가 만들어낸 피로와 고통들, 세상이 불편한 자신의 예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에 대한 격분(그는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예술은 뜨개질 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가식적으로 표현해내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그리고 삶과 시대 전체의 비극적 양상을 한꺼번에 목도한 자의 경악. 이런 것들이 그 회오리치는 붉은 물결과 내면에 상응하는 소용돌이로 터져나온 셈이다.뭉크는 불안한 사선과 꿈틀거리며 휘어도는 곡선들, 그리고 어쩐지 불안하고 불유쾌한 색감들과, 인간의 퀭하고 어두운 모습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제시한다. '뭉크스럽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그 스타일은, 아마도 고흐나 고갱에게서 기운을 빌린 것이겠지만, 분명히(!) 구스타프 클림트의 '패턴'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뭉크의 '키스'는 유난히 클림트의 '키스'와 닮은 화면의 흐름을 타고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불편해 하면서도 끝없이 '절규' 그림을 돌아보고 다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뭉크가 내놓은 절규는 철저히 사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예술이 된 순간 그것은 인간사회와 인간삶의 결정적인 지점을 통찰하는 상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규는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삶의 고통과 환멸은 뭉크가 붓을 내려놓고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되어 인간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절규는 영원하며 뭉크의 저 표정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인류의 마음 속을 뒤흔들며 비감한 생을 환기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뭉크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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