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일기자
동네마다 맛집이 있지만 이곳 충무로 맛집들은 과연 내공이 깊다.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성지(聖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데다 밤낮으로 분주한 인쇄소들 덕분이다. 천연기념물급의 골목에서 다닥다닥 어깨를 붙인 설렁탕 집, 낙지 집, 고등어구이 집, 김치찌개 집들은 식사 때마다 부산을 떨며 '어서 옵쇼' 손짓을 해댄다. 어제도 이 골목을 걸으며 무엇을 먹을까 심히 궁구하다가 문득 한 곳에 눈길이 머물렀으니, 20대 청춘이 고등어를 굽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 전까지 저 자리에는 중년 남성이 서 있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곁에서 귀띔해준다. 그 집 아들이라고, 대(代)를 이어 고등어를 굽는 기특한 효자라고.그러고 보니 근처 설렁탕 집도 낯선 총각이 얼마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 보아하니 대학을 갓 졸업했고, 듣자하니 주인집 아들이다.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는 폼이 아직은 서툴지만 이 청춘도 가업승계의 역군인 게다.'곳간에서 인심난다'지만 지금은 곳간에서 효자난다. 지옥 같은 취업난에 길을 잃은 청춘들은 결국 현실적인 궤적으로 편입한다. 부모 곁에서 음식을 만들고, 접시를 나르고, 계산을 하고, 때론 화물차를 몰고. 그래도, 비록 손바닥만한 가계라도 가업승계를 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다.찬바람 슬슬 부는 취업시즌, 비빌 언덕이 없는 취업준비생들은 가슴에 삭풍이 몰아친다. 교문 밖은 엄동설한의 광야. 그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백수에 삼포(연애ㆍ결혼ㆍ출산 포기)에 칠포(삼포에 인간관계ㆍ집ㆍ꿈ㆍ희망 포기)까지 뼈마디가 얼어붙는다. 말라 비틀어진 영혼은 눈보라에 훠이훠이 휩쓸린다. 그러니 졸업을 미룰 수밖에. 휴학과 군입대도 모자라면 졸업유예제도로 신분세탁을 꾀한다. 대학생도, 졸업생도, 사회인도 아닌 투명인간들이다. 취업을 위해서라면 성한 몸에 칼질이 또한 대수냐. 면접 점수를 높여준다는 입꼬리 올리는 수술, 인터뷰 때 떨지 않게 해준다는 목소리 수술, 취업운을 살려준다는 손금 성형까지 희극같은 비극이다.청년 실업자 100만명 시대, 취업률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실업자 절반은 구직을 포기했다. 희망과 꿈을 버렸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전설은 까마득하다. 지금은 개천 미꾸라지도 감지덕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현실, 그런 팍팍한 현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속절없이 헛헛해진다. 허기가 덧없이 밀려든다. 그래, 오늘 점심은 저 청춘이 구워주는 고등어구이다. 저녁은 가업승계 역군의 설렁탕 집이다. 그렇게라도 청춘들을 응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