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개한민국

3층, 2층, 1층…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가려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마땅히 사람이 걸어나와야 할 공간에서 몰티즈 한 마리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납시는 게 아닌가.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생각하면서 옆으로 비껴나 있는데 본새가 유별나다. 머리를 곱게 염색하고 조끼까지 걸쳤다. 패션이 주인과 한 세트다. 표정은 또 얼마나 오만발칙한지. 시선은 전방 15도, 가슴을 쭉 펴고 걷는 기세등등에 고만 기가 살짝 꺾이고 말았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고이 뿌려드릴까, 싶어졌다. 저녁 산책 잘 다녀오시라고 꾸벅 인사를 거의 할 뻔했다.어제 퇴근길 아파트 1층에서 맞닥뜨린 상황이다. 주인과 거룩하게 산책하는 녀석을 감상하느라 엘리베이터를 또다시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명언 하나가 가슴팍에 팍 꽃혔다. '개팔자가 상팔자다!' 아닌 게 아니라 아파트 공원이 개판이다. 날씨가 선선해지자 다들 콧바람 쐬러 나왔다. 큰 개, 작은 개, 털 많은 개, 벌거벗은 개, 속옷 걸친 개, 침 흘리는 개…. 사람들보다 개들이 더 신났다. 사실은 개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놀러 나왔다. 지들끼리 걷거나 뛰거나 짖어대면서 나와바리(구역)를 확인하느라 헥헥거린다. 개들 따라 주인들도 걷거나 뛰느라 헥헥거린다.애견 인구 1000만명 시대. 5명 중 1명이 개를 키운다. 아니, 받들어 모시고 산다. 1인 가구와 노년 인구 증가가 원인이다. 애완동물 시장 규모는 매년 15~20%씩 성장한다. 지난해 1조4300억원, 올해는 2조원을 넘본다. 개껌, 개카페, 개병원, 개요가, 개TV, 개장례식장…. 이러다 개자가용, 개별장, 개대학, 개투표권도 나올 판이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눈물겨운데….' 애견가들은 돈이 아깝지 않다.급기야 청와대마저 개가 접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박 대통령이 정말로 간만에 8월30일 페이스북에 글을 남긴 것도 개 때문이었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 선물받았던 진돗개 희망이와 새롬이가 5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새끼들 이름을 지어달라.''퍼스트 도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른다. 희망이와 새롬이가 꼬리를 흔들면 실세, 짖으면 허세다. 적적한 박 대통령의 개 사랑을 탓할 일은 아니다. 새끼 이름을 짓는 즐거움을 공유하려는 심정도 이해된다. 다만 개만도 못한 처지를 씁쓸해 하는 서민들의 한숨이 눈물겨울 뿐이다. ‘불통의 권력’에 위로받지 못해 희망이와 새롬이를 시기질투해야 하는 팍팍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개한민국이어서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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