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빅시리즈 #11. 또다른 한류 예감 '넌버벌 공연'
페인터즈 히어로 서울·제주 전용관서 365일 공연대사없이 화려한 춤·음악 등과 함께 그림 그려 중국기업과 손잡고 현지 진출해 넌버벌 릴레이 공연도
'페인터즈 히어로'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객석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답하고 있다.[사진제공=펜타토닉]
[아시아경제 김보경 기자, 김민영 기자, 주상돈 기자] 언어 장벽을 허문 넌버벌 퍼포먼스가 공연관광 프로그램으로 정착되며 요우커들을 사로잡고 있다. 대사 없이 춤과 음악, 무술, 그림 등으로 구성된 넌버벌 공연이 최근 단체관광의 일정으로 짜이는 경우가 많은데, 공연장을 찾은 중국인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틀에 박힌 요우커 단체 관광 프로그램에 넌버벌 공연이 포함되면서 한국 관광 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넌버벌 공연장을 찾아 콘텐츠 관광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엿봤다.◆요우커와 교감하는 넌버벌 공연= 지난 17일 오후 서울 종로에 자리한 서울극장 1층 로비는 때아닌 중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넌버벌 공연 '페인터즈 히어로'를 보기 위해 온 관람객들이다. 이들은 깃발을 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5층 공연장으로 입장해 자리를 잡았다. 이날 공연의 객석은 총 488석 가운데 약 400석이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등 중화권 관광객들로 채워졌다. 대부분 단체 관광객들로, 패키지 상품에 담긴 일정 중 하나다. 공연이 시작되기 5분 전, 검정색 페도라를 쓴 배우가 무대에 등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객석으로 뛰어 들어가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해주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행동과 표정으로 분위기를 띄우자 중국인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페인터즈 히어로는 대사 없이 춤과 음악, 화려한 조명과 영상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배우들이 그림을 그리는 넌버벌 공연이다. 4명의 남자배우가 코믹 연기를 펼치거나 격렬한 춤을 추면서 짧은 시간에 멋진 그림을 완성하자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중국인 관람객을 무대로 오르게 하는 등 관객들과 호흡하며 80분 내내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공연에는 중화권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소재가 곳곳에 등장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동물인 용과 호랑이를 비롯해 월드스타 리샤오룽(李小龍), 영화 '쿵푸팬더'의 캐릭터가 나오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코너에선 중국을 대표하는 고전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모습을 커다랗게 그려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관객들과 사진을 찍는 포토타임을 진행하는 등 팬서비스도 잊지 않았다.극장 앞에는 관광버스 5~6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공연을 보러 나온 중국인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다. 4박5일 단체관광을 온 중국인 오모(34ㆍ여)씨는 서울에서 보내는 첫 저녁의 마지막 일정을 이 공연으로 마무리했다. 오씨는 "한국 남자배우들이 박력 있게 춤을 추는 모습에 반했다"며 "이전에 중국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다른 일본 공연들과 함께 소개해주는 걸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도 모래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샌드아트'가 있지만 춤과 그림을 접목한 공연은 없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을 만큼 재밌었다"고 덧붙였다.◆넌버벌 주요 관객 '일본→중국'으로 전환= 페인터즈 히어로는 매 공연마다 객석의 50% 이상을 중국인 관광객들로 채우고 있다. 서울과 제주도 두 곳에 전용관을 두고 365일 연중무휴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다 보니 직원들은 외국어 안내 멘트를 교육받고, 중국인 직원도 상주하고 있다. 페인터즈 히어로의 제작사 펜타토닉의 정규철 대표는 "특별히 중국인들을 위해 공연 콘셉트를 바꾼 것은 아니지만 2012년부터 중국인 관람객들이 급격히 늘어난 건 사실"이라며 "'그림'이라는 친숙하고 글로벌한 소재에 다양한 기술과 재미를 더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도 통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정 대표는 "아직은 넌버벌 공연을 해외에 알리고 홍보하는 단계"라며 "지금은 패키지 상품의 일정 중 하나로 들어가 저녁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관람하는 경우도 많지만 다행히 호평이 많다"고 했다.국내 넌버벌 공연은 1997년 초연한 뮤지컬 공연 '난타'를 시작으로 시장을 넓혀 갔다. 지금은 15개의 크고 작은 넌버벌 공연이 선보이고 있다. 작품마다 무대 위에서 제각기 다른 기법을 선보이지만 무엇보다 '대사가 없다'는 콘셉트 자체가 언어권이 다른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장기간 상설공연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공연이 패키지여행 상품 일정으로 묶이려면 보통 6개월 전에 확정돼야 하고 자유여행을 하는 외국인 손님을 받기 위해선 연중무휴의 지속적인 공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난타' '점프' 등이 인기를 끌던 2010년 외국인 관객 수가 100만명을 돌파한 이래 2011년에 129만명, 2012년에 162만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반면 지난해 약 142만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일본의 우경화, 엔저 현상 등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감소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현재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급증하면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국가별 공연관광 관객을 살펴보면 중국인이 약 50만명으로 전년 대비 14.6%로 늘어났고, 일본인은 약 21만명으로 23.7% 감소했다.이 기세를 몰아 넌버벌 공연은 최근 중국 본토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내년 1월8일까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사춤' '드럼캣' '페인터즈 히어로' '점프' '난타' 등 총 5개 우리나라 상설공연팀이 68회에 걸쳐 릴레이 공연을 펼친다. 단순 초청공연이 아닌 중국기업과 공동제작으로 한 극장에서 릴레이 형식의 장기 공연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최대 민간 방송사이자 엔터테인먼트사인 SMG그룹과 손을 잡았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인상 시리즈'처럼 초대형 블록버스터 급은 아니지만 특유의 열정과 에너지, 발상의 전환, 관객 참여 유도 등 한국 넌버벌 공연만의 매력으로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고 있다.제작사들 대부분 정부 지원 못받는 영세업체 손님끌기 출혈경쟁으로 티켓값은 점점 낮아져 공연관광업 신설·산업 클러스터 구축 무색
지난 9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랑하면 춤을 춰라(사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 배우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제공=두비커뮤니케이션]
◆넌버벌 공연 '새 한류' 바람 일으키려면= 넌버벌 공연이 새로운 한류 콘텐츠이자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공연상품은 관광산업의 성장을 제고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형 콘텐츠로 떠올랐으며, 문화관광을 선호하는 세계 관광시장의 트렌드를 고려할 때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분야"라고 평하면서 넌버벌 공연의 잠재력을 강조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 시대의 관광대국으로서 위상을 더욱 높이려면 문화콘텐츠로 관광 매력도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탄탄한 작품성이 바탕이 된 난타는 지금까지 전 세계 약 985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총 매출 2080억원을 기록했고 현재도 최고흥행작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하지만 넌버벌 공연이 지금처럼 저가 상품 위주인 중국인 단체관광에 묶여 있는 관행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업계 전반의 견해다. 2010년 10월부터 페인터즈 히어로를 무대에 올린 정 대표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줄곧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지난해 첫 흑자를 냈고 올해 들어서야 의미 있는 수익이 날 것으로 보인다"면서 "넌버벌 공연 제작사들 대부분이 영세한 데다 정부의 투자ㆍ지원 대상에도 빠져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티켓 정가는 보통 4만~8만원대지만, 패키지 상품 속 티켓 단가는 영업 비밀에 부쳤다.최광일 한국공연관광협회장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중국 관광객들을 끌어오려는 공격적인 마케팅이 계속되면서 티켓 단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단체여행을 온 중국인 관람객들이 늘어났다고 해서 그와 비례해 매출액이 증가하는 수익구조가 아닌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행사에 티켓 가격을 대폭 할인해주거나, 일정량의 티켓을 구입하면 몇 장을 덤으로 얹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최 회장은 "티켓 가격의 정상화를 위해선 앞으로 주요 관객 타깃을 단체여행객이 아닌 자유여행객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들을 관객으로 유치하려면 넌버벌 공연의 질적 성장과 양질의 콘텐츠 개발이 필수"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공연업계 관계자도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형태가 단체여행에서 자유여행으로 넘어가는 추세"라며 "원하는 공연을 선택해서 보는 관람객들이 늘어난다면 경쟁력 있고 수준 높은 공연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재미없고 질 낮은 공연은 도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공연관광 업계에선 관광진흥개발기금 등을 통한 정부의 지원을 희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회에 관광진흥법 개정안(노웅래 새청치민주연합 의원 발의)이 계류된 상태다. 관광진흥법상에 '공연관광업'을 신설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현재 법상에는 관광공연장업이 명시돼 있지만, 공연과 동시에 일반음식점 허가를 받고 관광객들에게 식사나 주류를 판매하는 영업만이 이에 해당한다.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관람하는 쇼가 일례다.또한 다수의 넌버벌 공연장이 영화관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무대 설비와 크기, 음향 시스템 등의 제약이 있다. 이에 한국공연관광협회는 넌버벌 공연장과 산업을 한곳에 모은 클러스터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 지자체 등과 협의 중이다. 최 회장은 "넌버벌 공연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참여ㆍ공감할 수 있는 차세대 관광상품"이라며 "미국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영국의 '애든버러 프린지 축제'를 즐기기 위해 그 나라를 찾는 것처럼 넌버벌 공연을 보러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일이 목표"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취재=김보경ㆍ김민영ㆍ주상돈 기자 bkly477@통역=최정화ㆍ옌츠리무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주상돈 기자 d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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