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와 ‘스토킹 그리고 섹스’의 영화적 성 문법 읽기
루시아
* <루시아>는 벗고 들어왔다 = 스페인 영화 <섹스와 루시아>(2001)는,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냥 <루시아>로 바뀌었다. 말초적이고 야한 뉘앙스로 장사를 하는데 이골이 난 영화업자가 갑자기 정신이라도 나간 걸까. 대중의 관심에 찍찍이처럼 달라붙을 ‘섹스’라는 말을 감춰버린 건, 그런 불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이 영화가 가진 예술적인 면목을 부각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훌리오 메뎀의 이 영화는 개봉 이듬해 시애틀영화제 감독상을 탄 것 이외에도 이 땅에서 훈장같은 걸 가지고 있다. 우선 남녀의 성기가 등장하고 그 성기가 발기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영화인데도 검열을 무삭제로 통과했다. 영상심의위원장은 예술과 외술을 금긋는 기준으로 이 영화를 예로 들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17세 이상가’라고 딱지를 붙인 영화에 이 ‘걱정의 나라’가 이토록 후할 수 있었던 건, 스토리와 영화 미학에 꼭 필요한 섹스, 그러니 예술을 돋우는 섹스의 모델이 막 필요한 시점에, 마침 걸맞는 영화가 나와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시아
* 스토킹 그리고 섹스, 저질의 혐의 = 2004년에 나온 니시무라 신야 감독의 <스토킹 그리고 섹스>라는 영화의 원제목은 '멋진 사랑'이다. 루시아는 있는 ‘섹스’도 뺐는데, 이 영화는 없는 ‘섹스’도 넣었다. 물론 영화 속에 섹스가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마냥 저질인 건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탄탄한 스토리 구조 속에 일본 사회의 황폐한 남녀들을 인상적으로 부각시켰다. 섹스는 외롭고 억눌려있고 불온하고 아프다. 영화 ‘파리, 텍사스’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루시아
* 내숭에 관한 단상 = 선데이서울 이후로, 대한민국의 스포츠신문들 만큼 ‘섹스’를 사랑하는 미디어도 없을 것이다. 여가수의 동영상 따위의 뉴스를 핑계로 삼든, 해외 스타들의 난잡한 성생활을 볽아내든, 축축한 연재만화로 날마다 벗기든, 아니면 아예 대놓고 칼럼으로 수다를 떨든, 야한 포즈를 한 사진들로 승부를 걸든, 여하튼 섹스가 없었다면 스포츠신문들이 뭘 먹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탤런트가 열 번 했느냐 두 번 했느냐가 1면 머릿기사가 넉넉히 되는, 그런 신문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섹스-샤이(sex-shy)’ 같은 게 있다. 스포츠신문 에디터 시절, 매주 여섯명이 번갈아가며 쓰는 ‘성담론’ 칼럼의 시리즈 제목을 뭐로 할지 정할 때였다. 여섯 명의 칼럼이라는 점에 착안해 ‘식스 & 섹스’라는 제목이 나왔다. 그런데 ‘섹스’라는 말은 가능한 한 넣지 말자는 자기 검열에 걸려 통과되지 못했다.섹스에 관한 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탈을 쓰고 위선을 떨지 않을 수는 없다. 옷이 추위를 막거나 연약한 살갗을 보호하는 기능 이외에, 성기를 비롯한 성적인 기호들을 우아하게 감추는 구실을 하도록 고안되면서, 성에 대한 겉치레는 강화되어 왔을 것이다. 섹스 행위가 사방이 가려진 방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은 하나의 일상의 신화로 자리매김한다. 섹스에 관한 표현과 묘사와 의견들은 어느 사회이든 일정한 ‘금지’나 ‘제한’의 필터를 만나게 된다. 섹스를 가리고자 하는 생각들과, 섹스를 내보이고자 하는 생각들, 혹은 섹스를 하고싶거나 보고싶은 욕망들은 긴장의 대치를 이룬다. 그 경계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우리는 천박과 고상함으로 나누기도 하고, 봉건과 자유. 예술과 외설을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루시아>는 검열을 통과했고, ‘식스 & 섹스’는 통과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이중잣대와 기묘한 제스처, 그리고 위선을 무마하는 위선, 가식을 파괴하는 가식이 작동하기도 한다.
루시아
* 수중섹스, 일회성 섹스 = <루시아>는 현실과 꿈, 혹은 작품 속과 작품 밖,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섹스와 삶을 탐구한다. 우선 도입부에서 강렬하게 튀어나오는 로렌조와 엘레나의 섹스는 욕망의 다면체를 보여주는 화려한 이벤트이다. 그들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빈 섬에서 만나, 수중섹스를 한다. 오래전 어류였던 인간의 본능을 일깨우는 물 속에서, 섹스는 온갖 불결과 타락의 혐의를 정화(淨化)하는 이미지를 지닌다. 이들의 섹스는 반복되지 않는, 오직 일회성의 조우라는 점도 강렬하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나눈, 그리고 재회의 기약도 하지 않은, 오직 단 한번의 섹스는 두 사람의 가슴 속에 가장 힘있는 섹스 이미지로 남았다.
스토킹
* 카메라섹스, 소설섹스 = 소설가인 로렌조와 나이트클럽 종업원이자 골수 독자인 루시아의 교합은 욕망의 원형을 드러낸다. 로렌조는 섹스를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섹스는 적어도 두 개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위이다. 자기의 시선과 상대의 시선이다. 두 사람은 이 시선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끼워넣는다. 이들은 다시 만나서 섹스의 표정과 움직임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루시아는 로렌조 소설 속의 섹스의 일부이며 또한 다른 섹스를 엿보며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은 성행위는 소설 바깥의 현실적인 격렬한 신체 동작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의 섹스이기도 하다.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교합하는 체험을 이 영화는 감미롭게 보여준다.
스토킹
* 표절섹스, 패륜섹스 = 포르노 배우의 딸인 벨렌과 그 포르노 배우의 남자인 로렌조(이 남자는 제3의 남자로 이해되거나 엘레나의 섹스파트너인 카를로스로 비치기도 한다.)와의 섹스이다. 이 맥락이 나로선 이해가 잘 안되면서도 기묘하다. 벨렌은, 6년전의 엘레나와의 수중섹스로 낳은 딸을 돌보는 가정부이다. 로렌조 소설을 출판하는 동료는, 로렌조에게 그의 딸이 있음을 알려준다. 로렌조는 딸을 만나러 갔다가 벨렌을 알게된다. 그녀는 로렌조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포르노 배우라는 것과 그녀의 애인 이야기를 해준다. 로렌조는 소설가다운 영감으로 어머니의 애인을 유혹해보는 건 어떠냐는 귀띔을 한다. 벨렌은 한번 해보겠다고 한다. 우선 이 여자는 어머니의 포르노를 틀어놓고 같은 포즈를 취하며 자위를 한다. 물론 이 때, 어머니의 애인이 그녀를 훔쳐본다. 둘은 섹스를 할 뻔 한다. 그런데 ‘작가’ 로렌조의 상상력이 이 일을 계속 발전시킨다. 소설 속에서 벨렌은 로렌조에게 노골적으로 섹스를 요구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섹스를, 로렌조의 딸이 문을 열고 지켜본다. 그때 벨렌의 검은 개가 소녀를 물어죽인다. 이것이 현실인지 작품 속인지 경계가 지워져 있다. 섹스는 인간이 말뚝을 세워놓은 경계에 어른거리는 망상의 너울이다.
스토킹
* 소설적인 ‘구멍’ = 로렌조는 수중섹스의 추억과 그 결실인 딸 때문에, 루시아와의 완벽해보였던 결합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다. 그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듯 보였고, 루시아는 상처와 고립을 달래려, 로렌조의 빈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해변의 길에서 미지의 ‘구멍’에 빠진다. 이 구멍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루시아는 이곳에서 카를로스를 만난다. 그와 함께 온몸에 머드를 바르고 해변에 눕는다. 카를로스의 인상적인 성기가 욕망의 머리를 내미는 순간, 루시아는 말한다. 지금 나는, 그거 하고싶지 않아요. 카를로스는 흔쾌히 그런 생각을 수용하며, 그래요, 편안히 누워서 쉬어요,라고 말한다. 흙으로 누운 두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 이 또한 메뎀이 창조해낸 하나의 섹스이미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멍을 통과한 이야기는 ‘기적’을 만나면서 방향을 튼다. 로렌조는 죽지 않고 깨어나며 섬으로 루시아를 찾아온다.
스토킹
* 스토킹, 섹스의 껍데기같은 = 일본영화 ‘스토킹 그리고 섹스’는 뭐랄까 뒤틀리고 꼬인 영혼들의 꾸득꾸득하고 황량한 내면 풍경을 그린다. 고립된 삶들은 모두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모두가 무엇인가에 갇혀있다. 인력 채용 대행사에 근무하는 사토시는 평범해보이지만, 사실은 포르노 비디오 수집광이다. 친구와 함께 학교를 나와버린 여고생 아이바는 삶의 동기를 찾지 못하는 반항아이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번번이 나와버리는 사요리는 착하지만 외롭게 살고 있다. 그녀의 동생은 학교에서 왕따로 찍힌 고교생인데, 집에서 최음(催淫) 버섯을 길러서 파는 일을 한다. 성인섹스샵으로 포르노 비디오를 사러갔다가 사토시는 아이바를 만난다. 이 소녀가 주인으로부터 봉변을 당할 뻔 했는데 사토시가 구해준다. 그 뒤로 아이바는 사토시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는 아이바에게, 자기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요리를 스토킹해서 모든 것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소녀는 어느 날 다른 학생들에게 돈을 뜯기고 있는 사요리의 동생을 발견한다. 그 장면을 노려보고 있던 아이바는 불량배들과 싸움을 벌인다. 불량배들은 이 괴력 소녀에게 질려서 줄행랑을 친다. 그 뒤 아이바는 소년의 뒤를 따라간다. 소년의 집까지 간다. 사요리는 무릎을 다친 소녀를 치료해준다. 이로부터 아이바는 사요리의 삶을 훔쳐보는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토시를 만나, 사요리가 좋아하는 음악과 미술가를 얘기해준다. 사토시는 이런 정보를 활용해 ‘작업’을 걸기 시작하고, 사요리와 친밀해진다. 사요리의 집에서 네 사람이 만났을 때, 문득 팔씨름 내기가 벌어지고, 사토시와 아이바가 대결을 하게 된다. 이기는 사람에게 사요리가 키스를 해주기로 한 터였다. 사토시는 아이바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힘센 아이바가 그의 팔뚝을 넘겨버린다. 그런데 사요리는 아이바에게 혀가 깊이 오가는 프렌치 키스를 해준다. 이후 사토시의 작업은 계속 되고 두 사람의 육체적인 친밀도도 깊어진다. 그런데, 아이바는 이 둘을 질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토시가 아니라 사요리다. 결국 사요리에게 사토시의 스토킹 증거물이 배달되고 그녀는, 사토시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한다. * 사랑의 장애인, 스토커의 절뚝거림 = 아이바는 사토시를 따라가고 사유리와 그녀의 동생을 따라다닌다. 절뚝거리면서도 따라간다. 한없이 쓸쓸하고 세상을 경멸하는 듯한 아이바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이 배우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아이바 루비. 그녀는 사요리와 사토시의 섹스를 지켜보며 자위 행위를 한다. 그리고는 잠에 빠진 사요리에게 다가가 옷을 벗고 누워 애무를 한다. 아이바의 저 쓸쓸하고 무망한 섹스 욕망은, 스토킹의 본질을 문득 생각하게 한다. 타자와의 공감이나 교유가 없는 일방적인 집착은, 사요리 뒤에 벌거벗고 누운 아이바의 자세 그 자체이다. 그 체온을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삶의 온기를 높이고 싶은 몸짓, 스토킹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이 서성거린다. 섹스의 흥분과 상상의 감미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스페인 영화와, 스토킹처럼 교감 없는 집착으로 다다른 섹스의 폐허와 추위를 보여주는 일본 영화. 외롭지 않으려고 뛰어든 육체적 행위가 왜 이리 외로운가. 비슷한 내면을 지닌 두 ‘섹스’ 영화는 서로 다른 폴더에 저렇게 들어앉는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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