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배설 왜곡 논란, 실제 역사와 법정 쟁점은?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명량, 아바타 제치고 역대 흥행순위 1위[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인 1700만명 관람 기록을 세운 '명량'이 때아닌 '회오리'에 휩싸였다. 극중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배설 장군에 대한 왜곡ㆍ과장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후손들인 경주 배씨 성산공파 문중이 15일 경북 성주경찰서에 김한민 감독 등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법정으로까지 비화되고 말았다. 영화 속 배설 장군의 묘사는 제작진도 밝혔듯이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달라"는 제작진 측과 "사자명예훼손이 틀림없다"는 후손들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만큼 향후 법정 공방이 어떻게 진행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실제 배설 장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증과 논란이 커지고 있다. ◇ 영화속 문제의 장면은?후손들이 문제삼고 있는 영화 속 장면은 크게 네 부분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 장군이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된 것, 왜군과 내통하는 한편 이순신 장군의 암살을 시도한 장면, 거북선을 불태운 것, 도망 도중 아군의 화살에 척살당한 장면 등에 대해 후손들은 "역사적 허위 사실로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후손들은 배설 장군이 칠천량 해전 당시 용감히 싸워 포위망을 뚫고 12척의 전함을 살려 한산 본영으로 후퇴하는 등 전략적 행동을 통해 그나마 아군이 명량해전을 치를 수 있었던 자산을 보전하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배설 장군이 명량해전 15일 전에 이미 이순신 장군의 허가를 얻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암살 시도ㆍ거북선 화재ㆍ도주중 척살 등도 허구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후손들은 특히 "배설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화 속 최악의 인물로 묘사되면서 왜군보다 더 나쁜 역적이 되고 말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일단 제작진도 이 네 가지 영화 속 장면이 허구라는 지적에 별다른 이견은 없는 상태다.◇ '영화는 영화일 뿐' vs '사자명예훼손 처벌 대상'문제는 이 같은 영화 속 배설 장군 묘사가 '창작의 자유'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사자명예훼손죄'를 범한 것이지에 대해 입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제작진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영화적 상상력으로 인정해달라"는 입장이다. 제작진 측 한 관계자는 지난 3일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후손들에게 폐를 끼칠 의도는 없었다"면서 "배설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이나 설정도 허구와 사실,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으로 관객들도 미리 그것을 알고 수용하고 있는 만큼 사실과 다르다고 영화를 매도하지는 말아달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제작진의 입장은 이번 사건과 유사한 판례에서 법원이 헌법 제22조의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규정을 폭넓게 해석해 대부분 후손 또는 유족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는 추세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은 2010년 영화 '실미도'와 KBS 드라마 '서울1954'와 관련해 유족 등이 제작진을 상대로 낸 사자명예훼손 재판에서 "상업 영화ㆍ드라마의 특성상 이야기의 중심 축이 아니며, 흥미 고양 등을 위해 다소의 과장이 있더라도 이미 망인이 된 인물의 사회적ㆍ역사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인 허위사실의 적시가 있지 않다"는 취지의 판결로 '창작의 자유'에 손을 들어 준 바 있다.

배설 후손들이 15일 경북 성주경찰서에 영화 '명량'의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대법원은 특히 유사 사건에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명예감정이 침해됐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민법상 명예훼손이 될 수 없으며 통상의 건전한 상식을 가진 합리적인 시청자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유족들의 단순 감정만으로는 명예훼손죄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최근 법원은 '문중', '대종회' 등이 주체가 된 소송에 대해선 "사자명예훼손은 직계 후손 등 유족만이 제기할 수 있다"며 기각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린 바 있다. 이에 대해 조기연 변호사는 "허위사실에 의한 사자명예훼손에 있어 예술의 자유를 역사적 인물의 인격권보다 우위에 두는 판결이 많음을 고려할 때 사실이 아닌 부분이 다소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 맥락에서 사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하는 허위사실의 적시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반면 후손들은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며 승소를 장담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 분명하고 이전의 대법원 판례에서도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창작물의 경우 유죄로 선고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배윤호 경주배씨 문중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예술ㆍ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인 기본권은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와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되며, 실제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형사상 민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며 "영화 명량의 경우 배설 장군의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축이며, 묘사된 장면이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므로 형법상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또 소송 자격에 대해서도 "형사소송법상 사자명예훼손의 고소는 친족 내지는 자손이 할 수 있는데, 소송을 낸 경주배씨 서암공파 종중 등은 이에 해당된다"며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 실제 기록에 나타난 배설 장군은?이번 논란이 확산되면서 그동안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배설 장군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가고 있다. 경주배씨 문중의 명량 제작진 고소 사실이 알려지지 네티즌들은 "그래도 도망자인 것은 맞지 않냐"며 제작진을 옹호하는 입장과 "영화 속 묘사가 심했다. 차라리 가상 인물을 쓰던가 자막으로 후손들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고 비판하는 등 두 갈래의 반응을 보이면서 배설 장군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 배설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단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배설 장군에 대해 '비겁자' 내지는 '도망자'라는 시각을 내비친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12일(음력)자 일기에서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고 적었다. 또 8월19일자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8월27일자엔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갔던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 8월30일자에는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보냈더니 배설이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2일자엔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고 각각 적었다.선조실록에서도 '도망자'로 기록된다. 선조실록 93권(1597년 정유년 10월11일자)을 보면 비변사가 "수사 배설이 주사의 차장으로 주장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쳤으며, 이제 또 주장의 명령을 어기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다"며 처벌을 건의하고 선조도 이를 허락한다. 이후 배설은 1599년 권율에 의해 사로잡혀 참형당한 것으로 기록됐다.하지만 배설 장군을 단순히 비겁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실제 선조 실록 1597년 7월22일자 등엔 칠천량해전을 목격하고 온 선전관 김식, 대사헌 김간 등에 의해 배설 장군이 원균 장군과 함께 전투를 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적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해 전력을 보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배설 장군은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 광해군 2년 죄를 사면받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기도 했다. 일각에선 배설 장군의 행적에 대해 칠천량전투 패전 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며, 조정에 대한 반감·이순신 장군과의 불화 등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칠천량전투 패전 자체가 원균 등 당시 수군 지휘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권율 등 조정의 강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왜군 함대와 싸우다가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지휘부의 일인이었던 배설 장군으로서는 조정에 대한 불신과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순신 장군과는 '라이벌' 격인 원균 장군의 측근인데다 직위도 '동급'이어서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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