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리즈⑫ 사람 갈증에 한잔, 취기로 무료함 달래는 그들의 '술'탑골 편의점 3곳 막걸리 매출, 딴 곳의 5배주차된 차뒤에 신문지 깔고 술자리
지난 15일 김 할아버지가 낙원동 상가 주차장에 소박한 술상을 차렸다. 이날의 안주는 인근 교회서 나눠준 빵과 순댓국밥집에서 얻은 오도독뼈가 전부였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 김민영 기자] 주머니에 녹색 소주병을 꽂고 지나가는 할아버지. 유료주차장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켜는 노인들. 파고다공원 인근의 흔한 풍경이다. 술로 세월을 낚는 분들이려니 싶다가 문득 실상이 궁금해 근처 편의점을 들렀다. "가장 잘 팔리는 거요? 술이죠." 질문하기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따져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단다. 무조건 술이란다.파고다공원 일대에 가장 많은 점포가 있는 편의점은 세븐일레븐. 이 편의점은 공원에서 종로3가역까지 3군데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 CU가 두 곳, GS25와 미니스톱이 각각 1개씩이다. 우리는 세븐일레븐 본사에 협조를 요청했다.역시나 이곳 편의점들은 전국에 있는 다른 점포에 비해서 주류 매출이 월등히 높았다. 특히, 막걸리 매출이 타 점포에 비해 5배가량 더 많았다. 올 1~9월 파고다공원 인근 세븐일레븐 점포 세 곳의 매출을 분석해 보니, 이곳에서 팔린 막걸리 매출이 전국 평균보다 490.5% 많았다. 맥주도 479.5% 더 팔렸고 소주도 3배 가까이(272.3%) 더 나갔다. 전체 매출에서 주류가 차지하는 비중도 전국 점포의 평균이 6%인 데 비해 파고다공원 인근 점포들은 10.7%로 4.7%포인트 높았다. 이와 함께 술의 보완재(?)라고 할 수 있는 일회용 종이컵, 나무젓가락 매출도 각각 38.8%, 27.9% 더 높았다. 할아버지들의 '술 사랑'이 여지없이 숫자로 나타난 것인데 어르신들이 즐겨 먹지 않는 삼각김밥이나 햄버거의 경우, 전국 매장의 평균 매출보다 각각 3.4%, 22.1% 더 빠지는 것으로 나와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이 일대 한 편의점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 점장(32)은 술을 사는 할아버지 손님의 얼굴을 대부분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매일같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한 병, 두 병씩 사 가시는데 하루에 보통 4병 이상은 드시는 것 같아요."
15일 서울 종로구 파고다공원 동문 근처에서 강모(84·서울 중림동) 할아버지는 할인마트에서 산 막걸리 한통을 샀다. 어디를 가냐고 묻자 "친구가 기다려"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할아버지들이 편의점을 찾은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저렴한 가격 때문. 인근 식당에선 소주·막걸리가 한 병에 2000원, 잔술로 파는 막걸리도 1000원이다. 이것도 아주 비싼 편은 아니지만 식당에서 반주로 곁들일 것이라면 모를까 '애주가 할아버지'에겐 인근 편의점에서 사 마시는 게 훨씬 경제적인 것이다.파고다공원 주변에 있는 다른 편의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공원 인근 '수표로 22길'에 위치한 한 편의점의 점주는 "할아버지들이 언제 술을 사러 오냐"는 물음에 "아휴, 오전이든 오후든 대중없죠"라고 잘라 말한다. 아침부터 이어진 술 손님은 해가 지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안주 없이 소주만 달랑 사가는 경우가 많아요. 가끔 할머니랑 손잡고 오는 할아버지들은 과자도 사시고요." 술을 사면서 마땅히 마실 곳이 없는 할아버지들은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단다. 이 탓에 한 편의점 안에는 '여기서 술 드시면 안 돼요'라고 아예 붙여 놓기도 했다. "편의점 안에서 못 드시게 하니까 길가에 앉아 드시거나 근처 식당이나 포장마차에서 몰래몰래 드시는 것 같더라고요."편의점보다 조금 더 싸게 술을 사려는 할아버지들은 파고다공원 동문 쪽에 있는 할인마트를 찾는다. 이곳은 인근 편의점(소주·막걸리 평균 1300원)보다 100~200원 싸다. 이 가게에서만 소주와 막걸리가 하루에 평균 80병씩 나간다고 한다. 주말에는 100병 이상씩 팔리기도 한다. 그래서 주인은 소주와 막걸리로 채운 '술 냉장고'를 아예 입구에 놨다.할인마트 한 곳에서만 팔리는 막걸리는 파고다공원 인근 식당 전체에서 팔리는 막걸리의 절반에 육박한다. 낙원동과 돈의동, 묘동, 봉익동 등에 위치한 200여개의 식당에 막걸리를 납품하고 있는 ○○막걸리 종로대리점에 따르면 이들 식당에서 하루 평균 소비되는 막걸리는 200여통. 하루 종일 골목골목을 누비며 막걸리를 배달하는 유행복 사장(62)은 거의 매일 길에서 술을 드시는 할아버지들을 본다고 한다. "사람들 눈 피해서 길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 식당에 막걸리 납품하는 입장에서 할아버지들이 식당에서 드시면 좋겠지만 별 수 있나. 할아버지들 주머니 사정 뻔히 아는데."
김 할아버지가 인근 마트에서 산 소주 한 병을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넣고 낙원 상가 주차장으로 가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지난달 29일 오후 1시께. 마트로 들어선 김모 할아버지(77·서울 용두동). 능숙하게 냉장고에서 소주 1병을 꺼내 1000원짜리 한 장과 200원을 낸다. 값을 꿰고 있으니 잔돈까지 맞춘 것이다. 마트를 나서며 김 할아버지는 검은색 점퍼 오른쪽 주머니에 소주를 넣는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란다. 할아버지를 따라 5분여를 걸어 파고다공원 근처 한 과일가게 앞에 도착했다. 김 할아버지는 "가자고"라고 말하며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손짓을 하고는 낙원상가 지하상가 입구에 자리를 잡는다. 눅눅해진 종이컵에 소주를 한가득 따르고는 "자 한잔혀"라며 친구에게 먼저 권한다. 그사이 김 할아버지는 순댓국밥집에서 살이 조금 붙어 있는 오도독뼈 두 개를 손으로 집어왔다.길가에서 술을 마시는 이유를 묻자 김 할아버지는 "슈퍼에서 사면 1200원인데 식당 가면 두 배야, 두 배"라고 말하곤 종이컵에 가득 담긴 소주를 들이켠다. "형편에 따라 먹는 거지. 돈 있으면 근사하게 음식점 가서 먹고, 돈 없으면 여기서 먹고."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소주병이 비었다.오도독뼈를 손으로 집어가는 김 할아버지가 싫을 만도 한데 식당 주인은 오히려 "뜨거운 데 좀 있다가 가져가요"라며 김 할아버지를 걱정한다. 지난 수년간 거의 매일 얼굴을 익혀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다고 한다. "저 할아버지 몇 병이나 마시냐고? 한 번에 딱 한 병씩 사다가 마시는데 4병을 마실 때도 있고 6병을 마실 때도 있고. 종이컵 하나를 계속 쓰니 종이컵이 남아나나. 다 흐물흐물해지지."좀 떨어진 종묘공원의 풍경도 다를 바 없다. 종묘 서쪽 돌담길과 공영주차장 사이 보도블록. 삼삼오오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는 할아버지들을 자주 볼 수 있는 장소다. 주차된 차가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오후 2시께 이곳에서 할아버지 3명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신문지를 깐 바닥 위에 놓인 막걸리 3통 중 2통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채 비어 있었다. 이날은 최모 할아버지(75)가 술과 과자를 샀다. 막걸리 3통에 3900원, 과자 1000원. 종이컵은 인심 좋은 가게 주인이 공짜로 줬단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고 가을볕 맞으면서 한잔하면 얼마나 좋은데."
<div class="break_mod">◆옛날식 음악 DJ가 있는 낙원동 카페 '추억더하기'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추억더하기'에서 음악DJ 장민욱씨가 손님들의 신청곡과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맷 먼로의 '워크 어웨이', 가을에 듣기 참 좋은 노래죠. 신청하신 분 누구시죠?" 음악카페 DJ의 부드럽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색 베레모를 쓴 할아버지가 슬며시 손을 들자 DJ는 "멋쟁이시네. 모자를 쓰신 분들이 원래 멋져요. 내가 모자 썼다고는 말 못하지만요"라며 재치 있는 멘트로 웃음을 자아낸다.서울 낙원동에는 이렇게 1970년대 음악다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추억더하기' 카페가 있다. 그 시대 청춘의 상징이었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커다랗게 가게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명찰에 '청춘식'이라고 적힌 옛날식 교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카페에 들어서자 음악DJ가 틀어주는 감미로운 올드팝이 들렸다.'추억더하기'는 원래 낙원상가 4층의 실버영화관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다가, 서울시와 하나은행의 후원을 받아 지난 5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양은 도시락 등 식사는 3000원, 커피 등 차 종류는 2000원으로 저렴한 가격. 무엇보다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DJ에게 신청할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라는 점이 인기를 끄는 요인이다.이곳의 음악DJ 장민욱(58)씨가 앉아 있는 작은 룸 안에는 2700여장의 LP판이 벽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곱슬머리를 길게 기른 그는 1976년 영등포에서 음악DJ 생활을 시작해 노량진, 가리봉동 등을 거쳐 4년 전 낙원동에 터를 잡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쉴 새 없이 LP판이 돌아가는 턴테이블 옆에는 신청곡이 적힌 메모지가 여러 장 포개져 있었다. 장씨는 "신청곡의 70%는 어르신들이 20, 30대 때 들었던 추억의 팝송이고 그 외에는 배호, 이미자, 패티김 등 국내 유명가수가 부른 가요"라며 "정통 트로트 음악을 찾는 분은 거의 없다.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 더 절절하고 감동도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그는 어르신들이 관심 가질 만한 기사를 일일이 스크랩해 멘트에 활용하고 있었다. 이날은 조용필, 구봉서, 패티김 등 연예인들의 은관문화훈장 수상 보도와 노인 무임승차 축소 논란에 대한 기사를 소개해 손님들과 공유했다. 그가 장수 DJ로 사랑받는 비결인 듯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어르신들 중에는 직접 지은 시나 사연을 보내 낭독을 부탁하는 '적극 참여형'도 많다고 전했다.테이블 15개의 작은 가게 안에는 10여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친구와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거나, 신청곡을 적는 데 열중하는 할아버지, 학창시절 '미팅' 느낌을 내는 듯한 노년의 무리까지 그 모습도 다양했다. 김대영 '추억더하기' 실장(37)은 "날이 쌀쌀해지니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며 "장사한다고 보면 안 된다. 어르신들에게 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다.손님뿐만 아니라 홀 서빙을 맡은 4명의 직원들도 모두 65세 이상 노인들이었다. 교복 명찰에 적힌 대로 자신을 '청춘식'이라고 불러달라는 할아버지(73)는 "우리처럼 퇴직한 사람들은 집에서 시간 때우는 게 전부잖아. 이렇게 같은 또래끼리 얘기 나누고 일까지 할 수 있어서 좋지"라고 말했다. "일하기 힘에 부치진 않으세요"라는 질문에 돌아온 할아버지의 답. "힘닿는 데까지 하는 거지, 뭐. 즐거워야 하지 아니면 못해."
[관련기사]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