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축구대표팀[사진=정재훈 기자]
져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경기가 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1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브라질과의 친선 A매치가 그랬다. 경기를 보면서 브라질 축구와 관련한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먼저 경기 내용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팀과 만나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투혼을 선보였다. 2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1991년 6월 23일 포르투갈 포르투.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국제축구연맹 U-20 월드컵 전신)에 나선 남북 단일 ‘코리아’는 브라질과 8강전을 치렀다. 글쓴이는 경기를 춘천의 숙박업소에서 TV로 봤다. 전날 춘천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프로 축구 럭키금성 황소와 일화 천마의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취재한 까닭이었다. ‘코리아’는 조별리그 A조 첫 경기에서 조인철의 중거리 슛으로 결승골을 뽑아 강호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꺾었다. 그 뒤 아일랜드와 1 대1로 비기고 홈팀 포르투갈에 0대 1로 졌지만 조 2위(1승1무1패)로 8강에 올랐다. 당시 남북의 축구 실력은 출중했다. 1990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27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북한을 4 대3으로 이겼다.때마침 남북은 스포츠를 통해 교류의 물꼬를 텄다. 자연스레 단일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고, 곧 아시아 청소년 최고 수준의 팀이 꾸려졌다. 최익형, 박철, 강철, 노태경, 장현호, 이임생, 조진호, 한연철, 서동원, 이태홍(이상 남측), 김정선, 정강성, 김정만, 최영선, 윤철, 리창하, 최철, 조인철(이상 북측) 등이 그 구성원이었다. 8강에서 부딪힌 브라질은 성인은 물론 청소년 연령대에서도 세계 최강의 경기력을 자랑했다. 1977년 출범한 이 대회에서도 1983년과 1985년 두 차례나 우승했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도 조별 리그 B조에서 아이보리코스트(현 코트디부아르)와 스웨덴을 각각 2 대1과 3 대0으로 꺾고 멕시코와 2 대2로 비겨 가볍게 8강에 올랐다. 누가 봐도 브라질의 우세. 특히 ‘UFO 킥’을 구사하는 로베르토 카를로스는 그 주축 선수였다.
브라질 축구 대표팀[사진=정재훈 기자]
그러나 ‘코리아’ 선수들은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미드필드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양 팀 선수들의 경쟁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코리아’ 선수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파이팅이 넘치는 경기를 펼쳤다. 전반 15분 마르퀴뇨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40분 최철이 동점골을 넣었다. 전반전을 1 대2로 뒤진 ‘코리아‘는 후반 들어 기량 차이를 실감, 내리 3골을 내주며 1 대5로 졌다. 큰 점수 차 패배였지만 경기 뒤 선수들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최선을 다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코리아’ 선수들은 포르투갈에서 평양으로 직행해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남측 선수들은 두 달여에 걸친 평가전과 합숙 훈련 그리고 대회 출전 등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판문점 북쪽 지역인 통일각까지 마중 나온 북측 선수들과 헤어졌다. 판문점 남쪽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도 글쓴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선수들을 맞이했다. 금의환향 수준의 귀국길이었다. 두 번째는 관중이다. 12일 경기엔 국내 스포츠 사상 최다 관중인 6만5308명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과 독일의 준결승전에서 기록한 6만5256명의 기록을 넘어섰다. 1972년 6월 2일로 시계를 돌려보자. 국가 대표팀은 서울운동장에서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토스와 대결을 가졌다. 산토스는 이회택과 차범근에게 한 골씩을 내줬지만 통산 1204번째 골을 터뜨린 펠레의 활약에 힘입어 3대 2 승리를 챙겼다. 축구 올드 팬들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의 육상경기 트랙까지 관중이 몰려 있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개인 좌석이 거의 없었던 서울운동장의 관중 수용 능력은 2만4천명 정도였다. 이 경기에는 무려 3만5천여 명이 입장했다. 산토스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을 3대 0, 홍콩을 4 대0으로 꺾었다. 요즘 말로 아시아투어에 나선 산토스를 대한축구협회는 3만 달러를 주고 초청했다. 수출 10억 달러가 국가의 지상 목표였던 시절 이 돈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1961년 브라질 클럽 마두레이라가 방한해 국가 대표팀을 효창운동장에서 4대 2와 2 대0으로 물리치면서 시작된 한국과 브라질의 축구 교류는 그렇게 매번 숱한 화제를 남겼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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