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詩]정현종의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더 깊고/그 가장자리는/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거기 쓰는 말이/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복사꽃이 가득 피어 있는 마을 한복판에서 피부가 보얀 노인 둘이 바둑을 둔다. 한편에선 다른 노인이 책을 읽고 있다. 바둑 두는 노인에게 다가가 보았더니, 바둑판 위엔 아무 줄도 그어져 있지 않고 바둑돌도 없다. 빈손으로, 없는 돌을 옮기며 묵묵히 두고 있다. 독서삼매에 빠진 노인에게로 가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을 천천히 넘기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이상한 짓을, 멍하니 함께 들여다보다가 꿈을 깬다. 깨어나 문득 정현종의 해몽을 듣는다. "백지는 그 위에 쓰인 말보다 더 심오한 거야. 흰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어. 백지의 소리를 들어보라.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보내고 있지 않은가." 노인들은 빈 바둑을 통해 미묘하고 무한한 생각들을 서로 나누고, 빈 책을 읽으며 깊이 있는 사유를 해나가고 있었을까. 시인은, 그것보다는 쉬운, 현실적인 종이 사용법을 알려준다. 거기 쓰는 글이 여백의 숨결을 해치지 않는다면 상품(上品)일세. 빈 종이의 울림만큼 울릴 수 있는 글을 쓰게. 글이 만약에 흰 종이의 숨소리까지 낼 수 있다면 명품이라 할 만하네. 시(詩)여, 빈 종이의 허적(虛寂)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가. 백지를 모독하는 글 나부랭이를 쓰는 자들을 무지 무안하게 하는 백지철학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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