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제대로 끓여주지 않는다고 기내에서 승무원을 폭행한 대기업 간부는 결국 옷을 벗었다. 본의 아니게, 세상에서 제일 비싼 라면을 드신 셈이다. '라면상무'라는 희귀한 별칭으로 그는 한동안 인터넷 검색어판을 떠돌았다. 얼마 전 라면을 끓이는데 냄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여겨 제멋대로 상무로 승진시켜 조롱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오." '감히, 라면 따위가 인간을 개탄해?'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사람보다 낫다는 점을 증명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냄비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른바 '라면 5덕(德)'의 변이었다. "첫째, 나는 자기 값을 싸게 매깁니다. 희망소매가격이 몇 백원이죠. 늘 음식계의 바닥을 '낮은 포복'하며 빈한한 자의 요기와 국물이 되어주는 성자(聖者)의 길을 가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일은 없습니다. 둘째,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스프 한두 봉지 외엔 딸린 식구도 재산도 없습니다. 스스로의 몸 또한 최소한의 뼈대만 유지하죠. 그렇게 가볍고 단출해야 슈퍼마켓을 전전하는 데 부대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얇은 비닐조각의 보온과 차단막에 의존하여 집과 옷을 해결하는 저 소박과 무욕이 나의 면모입니다. 셋째, 생애에서 딱 두 번 뜨거워집니다. 몸을 만들 때가 처음이고, 누군가의 젓가락에 걸쳐지기 직전이 두 번째입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밥이 되기 위해, 누군가의 굶주림과 추위를 털어주기 위해 스스로 뜨거워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요. 넷째, 나는 감정노동자들처럼 잘 참으면서 부드러운 무표정을 유지하는 존재입니다. 30년 라면만 먹은 사람이 어느 날 아침 고꾸라져 죽었다는 이야기나, 라면 기름이 어쩌구저쩌구하는 뉴스까지도 못 들은 듯 참아냅니다. 옥생각을 품는 일은 없이 누구에게나 기꺼이 옷을 벗어줍니다. 다섯째, 나는 뒤끝이 깨끗합니다. 먹고 난 뒤엔 봉지 하나와 작은 부스러기 몇밖에 남지 않지요. 누군가에게 포식과 쾌락을 안겨주는 게 아니라 가볍게 스쳐간 듯, 그러나 좋이 한 끼를 베풀어준 뒤 가볍고 깨끗하게 떠납니다. 라면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가 몹시 사랑스러워졌다. 외국에 가서 좋은 음식 실컷 먹은 뒤 물리기 시작했을 때, 문득 생각나는 붉은 국물, 꼬부랑 면발. 후루룩 쩝쩝 그 소리만큼 그리운 게 있던가. 저 낮은 곳에서 저렴한 길을 묵묵히 가는 존재 앞에 문득 경건해졌다. '라면상무'란 말 안 쓸게, 친구. 글=향상(香象)<ⓒ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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