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20)]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곳, 부암동에 무릉계곡 있었다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터와 현진건 가옥터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사진=아시아경제 윤동주 기자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파트가 없는 동네. '도심 속 시골' 종로구 부암동은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마을였다. 동서편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펼쳐져 있는 풍경도 가히 일품이다. 이곳에 조선 초 세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같다고 해 별장을 짓고 살기도 했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별장 '무계정사(武溪精舍)'에서 집현전 학자들과 교우하며 글을 읽고, 활을 쏘며 지냈다.무계정사터 구석에는 소설 '운수좋은날'의 작가 현진건이 살다간 흔적이 남아 있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1935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고, 출옥 후 이곳에서 닭을 치며 곤궁한 삶을 살아가며 '무영탑'을 집필했다. 이처럼 무계정사터는 600년전 안평대군이 예술과 풍류를 즐겼던 공간이자, 70년전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만든 현진건이 가난한 소설가로 인생말년을 보낸 장소였다.

무계정사의 정자 터 앞 바위에는 '무계동'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사진=부암동 사랑모임

◆안평대군과 현진건이 살던 그곳= 15일 부암동 319-4번지 무계정사터를 찾았다. 부암동주민센터 오른쪽 골목길을 따라 200m 가량 올라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민센터에서 양쪽으로 몇 채 안 되는 단독주택들을 지나다보면 '현진건 집터'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먼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상황과 하층민의 삶을 고스란히 소설로 담았던 현진건의 생이 짤막한 글귀로 새겨져 있다. 표지석 뒤로는 무계정사 터가 펼쳐져 있다. 언덕 위 아무도 살지 않아 쓰러져 가는 한옥집이, 공가 앞마당에는 수북하게 낙엽들이 쌓여 있다. 마당의 오른쪽 한 켠 키가 큰 느티나무는 지나간 과거를 증명하듯 홀로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 느티나무 반대편으로 약수가 흘러나온다. 약수터 아래 손바닥만한 논에 초겨울에도 퍼렇게 멍든 벼가 안쓰러이 서 있다. 무계정사 터 주변으로는 이층집 두세 가구가 폐허가 된 한옥을 에워싸고 있다. 이 한옥집은 오래되긴 했지만, 안평대군 사후 지어져 무계정사와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자리에 안평대군이 정자를 세웠고 정자 앞 바위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자를 새겨놨는데, 그 바위는 그대로 남아있다. 안평의 별장이라는 증거다. 집 앞마당에는 1930년대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된 한옥이 하나 세워졌다. 바로 현진건의 가옥이다. 이후 1994년과 1999년 서울시에서 문화재지정을 검토했으나 승인되지 못 하고 2003년에는 급기야 철거돼 빈터만 남아있다. 무계정사 터와 현진건 집터는 지금 그저 터만 남아 있다. 또 이 땅은 개인 소유로 돼 최근 법원경매에 나왔다. 하지만 이를 공공에서 매입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자는 부암동 주민의 요구도 많다. '안견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배경지로 예술행사를 벌이고 있어 부암동의 명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1447년 음력 4월 20일 안평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성삼문 등과 함께 노닐던 도원의 풍경을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 그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복숭아나무 숲에 떠오른 붉은 노을을 노니는 환상적인 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빼앗긴 문화재로 현재 일본의 텐리대학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인 1451년 부암동 일대를 거닐다 발견한 곳으로 바로 몽유도원도와 닮아있는 동네라고 생각해 별장을 지었던 곳이다. 이 별장은 그의 정치적 맞수였던 형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면서 불타 없어졌다.

무계정사 터 아래로는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3대 산실 중 하나인 '오진암'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사진은 최근 열렸던 오진암 상량식 모습. 사진=부암동 사랑모임

◆'주차장 건립' 위기가 만든 요정 '오진암' 복원= 도성밖 왕자의 별장이 세워졌을 정도로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부암동은 최근 방문객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크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연이 훼손되고 각종 개발 압력이 커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다. 특히 무계정사터와 현진건 터의 보존운동은 주민센터 인근 주차장 건립계획이 발표된 이후 불이 붙었다. 지난 2009년 6월 종로구청은 이들 유적지 아래 위치한 토지를 매입해 주차장 건립사업을 예정 발표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힘을 합해 서명운동과 음악회를 벌이며,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안견기념사업회 역시 주민들을 지지했다. 또 안휘준 서울대명예교수, 5000원·5만원권 지폐의 인물인 율곡과 신사임당의 도안을 그린 이종상 화백,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도 힘을 보탰다. 이에따라 주차장 건립계획은 무산됐고, 대신 그 자리에 1970~80년대 유명했던 요정 '오진암'이 복원돼 들어서게 됐다. 오진암 터는 당초 무계정사의 활터에 지어졌다.오진암은 삼청각·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정치의 근거지의 하나다. 남북 냉전 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 도출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또 서울시 등록 1호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상업용 한옥의 형태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오진암은 안마당에 멋진 오동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요정으로 쓰이기 전 조선시대 말에는 내시화가인 이병직이 살던 집이기도 했다. 이병직은 한국전쟁당시 가세가 기울어 이 집을 오진암으로 넘기게 된 것이다. 오진암의 위치는 종로세무서 인근으로, 지난해 초 매각돼 관광호텔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이어 오진암의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기리고자 복원 결정이 내려졌다. 그 사업비용은 관광호텔을 짓는 시행사가 부담하기로 하면서 부암동 주차장 건립예정지가 복원 장소로 확정됐다. 최근 상량식을 마친 부암동 오진암 복원사업지에 공사가 완료되면 건물은 전통문화 전승관으로 활용된다. 이 안에서 주민들은 문화행사를 벌이며,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부암동의 주민이자 골목길해설사로 활동하는 김병애(여·66)씨는 "거주민은 내쫓고, 관광객만 반기는 그런 행정보다는 진정한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주민의 힘이 중요하다"면서 "주차장 건립 반대운동으로 오히려 주민들이 서로 만나게 되고, 마을의 전통을 공부하고 사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주변 부암동 역사유적지는 ? = 이렇게 부암동주민센터 오른쪽 골목길은 무계정사와 현진건, 오진암이 한 축의 문화유적 띠를 이루고 있다. 현진건 집터에서 좀 더 올라가면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당시 도성에 유행하던 성홍열을 피하기 위해 지은 별정이 있다. 반대편 창의문 인근으로는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고(故) '김환기' 화백의 '환기미술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해 있다. 자하문(창의문) 터널을 지나 내리막 길 방향으로는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이 있는데, 건물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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