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통령 한 사람의 힘으로 5년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현명한 국민들과 많은 전문가들이 요소요소에서 각자가 역할을 하는 커다란 시스템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속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중략) 현명한 국민들과 전문가들 속에서 답을 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그래도 최소한 물줄기는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9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제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는 조용하나 도발적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통령, 또는 리더와 전혀 다른 개념을 내세운다. 그는 조직을 주도하는 리더가 아니라 시스템 안의 리더가, 결정을 전달하는 리더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전달받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다. 안철수는 리더를 뽑는 가장 큰 이벤트에 나서며 리더의 색깔을 지우겠다는 말로 오히려 다른 후보와 자신을 차별화 시켰다. 안철수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리더가 아닌 시스템을 화두로 꺼낸 그의 문제제기는 이미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MBC <골든타임>과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은 그 대표적인 예다. 각각의 장르에서 가장 화제작인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모두 조직, 리더십, 시스템의 문제를 깊게 파고든다. <H3>능력 좋은 개인보다 시스템을 갖춘 조직</H3>
[미생]은 조직이 한 개인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시스템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골든타임>과 <미생>은 한 명의 인턴, 이민우(이선균)와 장그래가 각각 세중대학병원과 무역회사 원인터네셔널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걸 배워야 하는 인턴의 특성상 두 작품은 이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조직을 명확히 드러낸다. <골든타임>은 이렇다 할 체계 없이 별 다른 시스템 없이 세중대의 중증 환자 치료를 도맡아 온 최인혁(이성민)이 사라진 상황을 보여준다. 의사들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고, 이민우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기 힘들다. 반면 중증센터가 마련된 후, 최인혁이 담당할 수 없는 골반이 심하게 골절된 환자가 오자 그 분야에 정통한 정형외과 박성진 의사가 주축이 되어 수술에 성공한다. 최인혁은 뛰어난 개인이지만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누구라도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골든타임>이 제대로 된 시스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면 <미생>은 완성된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결과물을 보여준다. 10년 넘게 바둑을 두다 원인터내셔널에 들어간 장그래는 상사들을 통해 끊임없이 회사 업무를 배운다. 상사들이 멘토의 역할을 자처해서가 아니다. 원인터네셔널은 “어느 누군가의 개성만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도록”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오 과장이 사업 아이템을 “이 판에 있다 보면 보이는 감”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면 김 대리는 근거를 들어 말리고, 관리팀과 재무팀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업에 대한 검토에 검토를 한다. 조직 시스템의 모든 영역에서 조직원들이 각자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자신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검토에 검토를 한다. 리더의 말 한마디, 또는 능력 좋고 주장 강한 사람에 의해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생>에서 오 과장의 상사 김 부장은 말한다. “산업화 시대가 아니라고. 누구 한 명의 캐릭터로 성사가 결정되는 일이란 건 회사로서 매우 위험해.” <H3>히어로가 필요하지 않는 세상</H3>
조직원들의 의견을 하나씩 수렴하는 강재인의 리더십은 약해보이지만 같은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다.
모두에게 직급에 맞는 권한과 역할을 이상적으로 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리더가 권력을 나누고, 그만큼 시스템에 가려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권을 시스템에 얼마나 부여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리더의 몫이다. <미생>처럼 리더가 나서지 않아도 단계별로 의사 결정이 제대로 이뤄지는 시스템은 이상에 가깝다. 리더는 조직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시스템에 의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관료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골든타임>의 또 다른 인턴이자, 이제는 병원 이사장의 손녀인 강재인(황정음)은 이런 리더가 되기 위한 성장통을 겪는다. 할아버지 강대제(장용)와 달리 강재인은 자신이 추진하려는 일에 대해 큰 반발에 부딪친다. 조직원들이 같은 일도 강대제에게는 찬성하고 강재인에게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카리스마”다. 강대제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중요 현안을 주도하고 지시하는 방식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강재인은 조직원들의 의견을 하나씩 수렴한다. 그는 혼자 결정을 내리는 대신 이해 관계자들로부터 문제 원인을 듣고, 그 덕분에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소방 헬기 활용을 통해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는다. 수평적 리더십은 힘이 없어 보인다. 비효율적이고 지루해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조직원들이 문제의 해결 과정에 대해 납득할 수 있고, 한 방향으로 힘을 모을 수 있으며, 같은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다. 개인에게 의지하기보다 각자가 열심히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매끄럽게 운영하는 것. <골든타임>은 동시간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 중이고, <미생>은 가장 인기 있는 웹툰 중 하나다. 그리고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명이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시스템의 문제를 거론했다. 이들의 말이 반드시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해 그만큼 많은 대중이 공감하고 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어로는 없지만, 모두가 주인이 될 수는 있는 조직의 시스템. 그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미래는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남은 일은 미래가 퍼져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이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한여울 기자 sixteen@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취재팀 글. 한여울 기자 sixteen@편집팀 편집. 이지혜 seve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