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우리 나라 재계사(財界史)에선 1945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8·15 해방 이전을 선사시대로, 그 이후를 역사시대로 구분한다. 다시 말해 1945년 8·15 해방 이전의 재계사는 '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이전의 시대는 우리 재계사에 편입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떠한 구분 짓기에도 으레 경계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란 또 다른 일출을 기대케 하는 웅숭깊은 여명이라는 점에서 때로 남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더욱이 애써 돌아보려 하지 않아서일 뿐 '경계의 시대'에도 뭇사람들은 마르지 않는 눈동자로 어기차게 살아왔다. 또 뭇사람들이라면 어차피 누구나 그 무언가를 팔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경계의 시대에도 달구리와 해넘이같이 또 나름의 흥망성쇠가,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이 하루 아침에 뚝딱 탄생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그 때부터 어떤 기업적 학습과 단련 같은 것이 존재했을 거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 경계의 시대는 어떤 황당무계한 드라마가 결코 아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애써 찾아야 하는 유효한 역사이다.'한국기업성장사'는 이같이 우리 재계사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경계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드라마와도 같은 흥망성쇠의 재계가 엄연히 존재했던 500년 조선 상계의 몰락에서부터, 가혹한 일제 식민 지배와 함께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근대화의 경이, 그리고 해방 이후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철저히 파괴된 폐허와 공허 속에서 오늘날의 '미러클 코리아릮' 성장할 수 있기까지의 지난 한 세기를 숨 가쁘게 관통하게 될 것이다. 그렇대도 우리 기업의 성장사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상거를 대략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틀림이 없다. 백여 년 전이라면 고종 임금이 경복궁의 근정전에 앉아 호령했을 조선왕조의 말기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였다.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나라다. 국초 이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업을 널리 장려한 반면에, 억말무본(抑末無本)이라 하여 상업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따라서 장사를 하고 싶어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상인이 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상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그러나 이웃 나라들은 우리의 이러한 사정과 사뭇 달랐다. 중국의 향신들, 말하자면 지방의 양반들이 모이는 장소는 으레 시장과 밀접한 곳이었다. 일본의 지배층인 사무라이 계급 역시 에도(江戶) 막부 이후에는 대부분 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살았다.이와 달리 우리는 지방 양반들의 성격 자체가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다, 숭유적 관념으로 상업을 천시한 나머지 생활 영역에 시장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다시 말해 중국의 향교 제사나 일본의 신사(神社) 제사 때는 각기 그러한 행사에 맞춰 시장까지 열리곤 하였으나, 우리의 경우에는 향교 자체가 시장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규율을 지니고 있었다.그리하여 우리의 시장은 오랫동안 대량 자본과 소비체인 양반들이 빠진, 소량 자본과 소비체인 하층민들만의 구조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자본 축적의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렇게 형성된 하층민들만의 구조는 훗날 우리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개항을 전후해 세계시장에 편입되면서, 그야말로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의 무대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손치더라도 과연 시장이 없는 억말무본의 이상국가가 가능하기나 했던 것일까. 수염이 석 자라는 양반도 당장 먹어야 살 수 있고, 또 그런 먹거리를 구하려면 속절없이 시장으로 가야만 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억말무본의 논란 바깥에 자리한 시장이 딱 한 곳 있기는 했다. 한성의 도성 안이었다. 100여 년 전 한성의 도성 안은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동화 속처럼 작고 아름다운 도읍이었다. 흥인지문(동)·돈의문(서)·숭례문(남)·숙정문(북) 등이 우뚝 선 사대문 안에는, 동대문에서부터 서대문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뚫린 56척(약 17m) 너비에 15리(약 6km) 길이의 종루대로(지금의 종로)와 다시 종루대로에서 정궁인 경복궁의 광화문까지 폭 190척(약 58m)에 달하는 육조 거리가 마치 광장처럼 훤히 뚫린, 도성 안의 인구라야 고작 20만 명 가량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도성 안의 주거 지역은 대부분 세습이었다. 외국인은 물론이고 지방 사람들조차 함부로 끼어들어와 섞일 일이라곤 없었다. 태조 이래 500여 년 동안이나 서울은 시간이 정지하고 만 듯 한결 같은 풍경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었다. 도성 안에서도 그 한복판이랄 수 있는 종루 네거리(지금의 종로 2가)에 여섯 시전(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컨대 공단·대단·사단·우단 등 주로 중국산 비단을 거래하는 '입전', 견직물 등을 비롯해 주로 국산 비단만을 판매하는 '면주전', 무명 옷감에서부터 세금으로 걷히는 군포목·공물목·무녀목 따위를 거래하는 '면포전', 주모 모시를 거래하는 '저포전', 다양한 종류의 종이와 그 가공품 따위를 취급하는 '지전', 그리고 종루에 자리한 내어물전과 서소문 바깥에 자리한 외어물전을 합친 '내·외어물전'까지, 모두 여섯 집단 시전을 통칭해 이른바 '종루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렀다. 종루 육의전은 조선 건국에 때맞춰 태종 12년(1412)에 처음으로 시전을 연 이래 무려 500여 년 동안이나 거의 매일같이 열렸다. 더구나 이러한 시전들은 여러 대를 이어오며 한 종류의 상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 상품의 가짓수만도 수십 가지를 헤아려 다양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종루 육의전의 시전 풍경 또한 남달랐다. 웬만한 여염집 서너 채를 일렬로 잇대어 놓은 것처럼 모두가 동일하게 길쭉길쭉한 기와집을 하고 있었다.물론 이런 풍경을 이루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길거리 쪽에 면해 있는 정면 앞 칸이 상품 진열장과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는 쓰임새라면, 좁고 긴 통로를 따라 여러 작은 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뒤 칸은 주로 상품을 쌓아두는 창고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전방들이 종루통을 중심으로 자그마치 3000여 칸이나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나라 안에 단 한 군데 밖에 없는 시장답게 규모 또한 상당했다. 종루 네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지금의 종로 3가 끄트머리인 배오개까지, 서쪽으로는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맞은편 북청교 자리까지, 남쪽으로는 지금의 을지로 2가 일대까지, 북쪽으로는 지금의 견지동 일대까지 널찍하게 뻗어나가, 그야말로 종루 육의전의 바닥을 한바탕 둘러보는 데만 종일이 걸린다는 얘기가 나돌 만도 했다. 가히 '조선의 만물상'이라고 부르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시골뜨기가 어쩌다 한성의 육의전이라도 둘러볼라치면 정신을 홀딱 빼어놓기 일쑤였다. 시골 장터라야 기껏 골목길 양편으로 기다랗게 늘어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반해, 종루 육의전의 바닥은 그러한 골목길이 두 겹, 세 겹, 심지어는 네 겹까지 겹쳐져 있었다. 더구나 골목길은 또다시 가로 세로로 교차해 있어, 교차로에 익숙하지 않은 시골뜨기들은 복잡 미묘하게 얽혀있는 미로에 갇혀 영락없이 해맬 수밖에는 없었다. 마치 거기가 거기 같고 지나왔던 길이 전혀 새로운 길처럼 보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육의전 바닥을 마냥 맴돌기에 딱 알맞았다. 이 뿐 아니었다. 종루 육의전의 바닥으로 들어서면 언제 어느 때나 오가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려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온통 시끌벅적 북새였다. 더구나 대장의(大長依)에 검은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을 단 차림으로 전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오가는 사람을 꼬드김으로 끌어들여 전방 주인으로부터 구전을 챙기는 여리꾼의 요란스런 호객이며, 물건의 흥정을 붙여주고 구전을 챙겨 담는 거간꾼의 쇳소리가 마치 오뉴월의 똥파리처럼 귓전에 연방 따갑게 엉겨 붙기 일쑤였다.이처럼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도성 안 일반 대중의 소비 수요에 부응해 갖가지 상품을 판매하는 한편, 관청의 수요품이나 생필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일정한 국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들이 부담해야 할 국역은 상세(상업세)와 공랑세(육의전 건물세)를 내고, 책판과 잡역 등을 맡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국가로부터 허락받았다. 조선왕조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상세는 시전의 등급에 따라 매월 저화(화폐로 통용되던 종이) 3?9장으로 정해졌고, 공랑세는 시전의 칸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각기 저화 20장씩이 부과되었다. 책판은 국가의 임시 수요물이나 외국 사신을 응대할 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사신과의 무역에도 응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잡역은 국장(國葬)이나 산, 능 따위의 조성 공사에 출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조는 종루 육의전의 시전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면서 시전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왕조와 종루 육의전은 오랫동안 공존공생 관계를 맺어왔다. 조정에서는 종루 육의전으로부터 필요한 국역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자금을 대여해주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이들의 상권을 보호하고자 그들 이외의 모든 상업 활동을 불법 행위로 여기고 금지한다는, 이른바 '금난전권(禁亂廛權)'으로 일컬어지는 별도의 특권을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했다. 금난전권이라 함은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는 난전(亂廛)을 불법 행위로 금지하되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에게만 부여하는 권한, 다시 말해 난전을 막을 수 있도록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내어주어 금지케 한다는 특혜였다. 그 특혜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막을 수 있도록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사병(私兵)과도 같은 무뢰배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국초 이래 500여 년 동안이나 육의전의 체제를 철옹성처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서 종루 육의전의 상인들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무뢰배들을 고용했다'는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일제 말기와 해방을 전후해 아래위로 두툼한 양복을 빼입고서 중절모까지 눌러쓴, 한때 종로 거리를 주름잡았다던 주먹들이 새삼 떠오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좀 더 뒷날의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들에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종로 우미관(종로 2가에 있던 극장) 골목의 주먹 김두한을 필두로 한 구마적과 신마적, 또한 그들을 꺾으려고 호시탐탐 날이 선 '니뽄도'를 뽑아들었던 진고개 일대 혼마치(지금의 충무로)의 하야시 역시 이러한 금난전권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조선 상계의 메카였던 종로 거리를 무대 삼아 한 시대를 살아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역사적인 필연이었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는 것처럼 상업과 주먹은 일찍부터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왕조와 종루 육의전은 오랫동안 공존공생의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조정은 종루 육의전으로부터 필요한 국역을 공급받는 대신에, 예의 금난전권을 비롯해 보부상(褓負商)처럼 전국적으로 상권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도록 별도의 특권을 그들에게 부여해 주면서, 국초 이래 굳건한 조직체를 형성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 불지 않는 곳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제아무리 굳건한 조직체를 형성했다 하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인구의 증가는 돌이키기 어려운 변곡점이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 왕조 말기에 이르러 신분을 사고파는 신분제의 변동과 같은 누적된 요인으로 말미암아 그간 철옹성으로 불리던 조선 상계도 점차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가 거덜날 뻔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요청을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마침내 정조 연간(1791)에 식유민천(食有民天), 곧 백성들의 기본 호구는 충족시켜야 한다는 유교적 이념에서 일반 백성이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 이른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도성 안의 종루 육의전을 제외한 나라 안 어디에서나 금난전권을 폐지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국가로부터 유일하게 허락받은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 말고도 (한강변에 상권을 이룬)경강상인들과 같은 사상(私商)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이런 사상들이 증가하면서 왕조 말기의 조선 상계는 마침내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경쟁 관계를 이루게 되었고, 결국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사상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금난전권의 폐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껏 한성 바깥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도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상권이었다. 알토란같은 도성 안의 상권을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이 여전히 움켜쥐고서 독식한 체 그 찌꺼기나 다를 게 없는 나머지의 것들, 그러니까 도성 바깥으로 나가 서민들을 상대로 푼돈이나 주고받는 상거래에 한정한다는 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봉건적 왕정 체제에서 길거리의 소상인 정도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본격적인 상인의 출현은 아직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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