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주명 논설위원]항아리는 우리의 전통 보관용기다. 장이나 김치를 담그면 항아리에 넣어 장독대에 놓아두거나 땅속에 묻어둔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통일비용을 미리 준비하는 제도를 만들겠다며 그것에 '통일 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을 자기가 지었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그의 자부심과 애착이 매우 큰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럴듯하다. 작명자 본인의 생각과는 다른 이유에서 그렇다. 국어사전을 보면 '항아리'는 '아가리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독)'이다. '통일 항아리'도 '아가리가 좁고 배가 부른' 발상이다. 다양한 통일방식 중 흡수통일만을 전제로 한 것이고, 국가재정 우선순위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고민도 없다. 통일부는 남북협력기금에 별도의 '통일계정'을 신설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 중이다. 지난 5일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는 올해부터 바로 통일계정 적립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통일 항아리는 이 계정의 '공식 별칭'이다. 남북협력기금 예산 중 불용액, 정부와 민간의 출연금 등을 그 계정에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통일비용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통일 항아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광복절에 갑자기 '통일세를 준비할 때가 됐다'고 한 발언의 연장선에서 추진되는 통일재원 조달방안이다. 그 사이에 통일비용이 얼마네, 통일세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걷어야 하네 하는 논의가 무성했다. 하지만 당장 통일세를 걷는 것은 성급하고 무리한 일이라고 정부는 판단했다. 납세자인 국민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대통령의 '깊은 뜻'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류 장관이 내놓은 것이 통일 항아리다. 처음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정부 안에서는 몇 달 만에 각광을 받게 됐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계기로 북한 내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과 통일비용 조달에 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항아리는 통일세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통일 과정에 소요될 비용을 지금부터 조달해 쌓는 것은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의 말마따나 '20대 젊은이가 수의부터 준비하는 꼴'이다. 남북협력기금 불용액을 통일 항아리에 넣어두는 것은 국가재정과 공적기금의 운용원칙에도 어긋난다. 남북협력기금 예산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부지원금은 회계연도 단위로 운용ㆍ결산ㆍ평가하고 불용액이 있으면 국고로 되돌리는 것이 원칙이다. 국민이 낸 세금에서 배정된 돈의 일부를 항아리에 넣어두겠다고 하니, 통일부가 납세자의 돈을 삥땅해 딴 주머니를 차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안 할 수 없다. 남북협력기금 예산은 편성된 당해 연도에 목적에 맞게 전액 다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는 남북교류가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여 매년 1조원가량 편성되는 남북협력기금 예산 중 평균 90%가 불용 처리됐다. 통일비용 추정도 통일편익과 분단비용까지 두루 고려하는 겹눈의 폭넓은 관점에서 다시 해야 한다. 류 장관이 통일 항아리에 채우고자 하는 목표 적립금은 '20년 후 55조원'이다. 이는 2030년 통일을 가정한 경우의 통일비용 중 첫 1년간 소요될 금액으로 통일연구원이 추정한 56조~249조원의 최소액과 거의 같다. 그동안 제시된 통일비용 추정액은 수백조원에서 수천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통일에 따른 분단비용 제거분을 누락시켰거나, 투자를 비용에 합산했거나, 통일편익을 고려하지 않았다. 통일비용보다 통일편익이 클 수도 있다. 통일 직후 집중될 행정적 통일비용은 국채발행이나 금융기법을 통해 중장기적 통일투자 수익과 상계할 수 있다. 통일비용 준비는 통일이 어느 정도 가시화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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