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밴쿠버 입단 기자회견에서의 이영표(사진=밴쿠버 구단 홈페이지 캡쳐)
북미 대륙은 오랜 기간 축구 불모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창설 대회인 1930년 월드컵(우루과이)에서 파라과이와 벨기에를 각각 3-0으로 물리치고 4강에 올랐다.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는 잉글랜드를 1-0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뒤에는 지역 경쟁자인 멕시코와 캐나다 그리고 중미의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에 밀려 번번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 대회부터 미국은 다시 월드컵에 개근하고 있다. 1994년 미국대회 16강, 2002년 한·일대회 8강,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대회 16강 등 성적도 꾸준하다. 11월 현재 FIFA 랭킹은 34위. 32위의 한국보다 2계단이 더 낮다. 물론 FIFA 랭킹은 특정 국가의 축구 실력을 100%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한때 10위권 내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30여 년 전 북미 대륙에는 한바탕 축구 붐이 일었다. 1971년 창설된 박대통령배대회는 1970년대 중반부터 초청 팀을 아시아권에서 세계로 넓혔고 외국의 유명 클럽이 많이 출전했다. 그 가운데에는 NASL의 워싱턴 디플로메츠도 있었다. 1978년 대회에 출전한 워싱턴은 국가 대표 1진인 화랑과 조별 예선과 결승에서 만나 각각 2-3, 2-6으로 졌다. 하지만 국내 미국 축구를 알리는 첫 계기가 됐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 NASL을 조직하고 1970~80년대에 걸쳐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조지 베스트 등을 영입해 축구를 뿌리내리기 위해 애썼다. 거스 히딩크 감독도 1970년대 중반 워싱턴 디플로메츠 등 NASL에서 뛰었다. NASL은 1970년대 후반 절정기를 누렸다. 조영증은 1983년 국내 프로 축구 출범과 함께 돌아오긴 했지만 1981년 국가 대표팀에서 물러나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 1년 뒤 시카고 스팅즈로 이적하며 NASL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활약했다. NASL은 1980년대 들면서 구단 확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데다 선수들의 치솟는 몸값을 버티지 못해 1984시즌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뒤로 다시 일기 시작한 축구 붐에 힘입어 1993년 12월 MLS가 출범했다. 그때 이후 많은 우수 선수들이 유럽의 여러 리그로 진출하며 실력을 길렀다.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진 랜던 도너번은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르 레버쿠젠에서 뛰다 MLS의 로스앤젤레스로 옮겼고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에버턴으로 임대 이적해 활약했다. 올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뛰었다. MLS는 유럽의 상위권 리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수준 이하의 리그도 아니다. 홍명보와 이영표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삼을 정도의 수준은 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