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통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 '파브리카' 창의성 배운다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남다른 시각'을 의미하는 '두 가지 색깔의 눈'(Two-colored eyes)은 베네통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 파브리카(Fabrica)의 상징이다.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남다른 시각'은 창의성의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다른 시각'만 가지고 있다고 다 창의적인 사람일까? 파브리카는 망설임 없이 '남다른 시각'에 '소통(communication)'이 더해져야 한다는 답을 내놓는다. 다양한 언어, 문화,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서로 소통할 때 창의성이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미숙한 신생아를 키우듯 창의적인 젊은이들을 미래의 아티스트로 키워내는 창의성 인큐베이터, 파브리카를 이탈리아 현지에서 들여다봤다.
파브리카의 상징인 두 가지 색깔의 눈(two-colored eyes)
▲파브리카에 담긴 철학=지난 5일, 이탈리아의 트레비조(Treviso)에 위치한 파브리카를 방문한 기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문이 있어야할 자리가 그저 뻥 뚫려 있었다. 안과 밖의 경계를 없애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건축물에도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는 철학을 담아낸 '파브리카'센터. 이곳에서는 창의성이 '열린 마음(open mind)'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탈리아 트레비조에 위치한 파브리카 건물. 2000년 일본출신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리뉴얼했다.
1994년 이탈리아 의류기업인 베네통이 젊은이들의 창의성을 발굴하고 후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파브리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곳은 강의를 듣고 학위를 따는 보통의 '학교'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고객들로부터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디자인 에이전시'도 물론 아니었다. 베네통의 후원을 받지만 베네통의 산하기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베네통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베네통 역시 많은 협력 파트너 중 하나일 뿐이다. 파브리카 구성원들은 학교, 기업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이곳을 '창의성 인큐베이터'이자 '다음 세대 디자이너들을 위한 훈련소'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선발된 만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1년 동안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베네통을 비롯한 세계적인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이탈리아 밀라노의 현대미술관인 라 트리엔날레(La Triennale)에서 대형 기획전시를 열기도 한다. 또 NGO나 국제사면위원회, 국경없는 기자회, UN세계보건기구(UNWHO) 등 각종 국제기구와 사회ㆍ문화 캠페인을 벌이는 등 다양한 파트너들과 공동프로젝트를 하면서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파브리카 내에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음악, 영화, 글쓰기 등 다양한 분과로 나뉘어 개별작업을 하거나 협동작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파브리카에 오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만 25세 이하의 젊은이라는 것과 파브리카의 선발과정인 트라이얼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만 있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포트폴리오에도 정해진 형식은 없다. 모집 시기나 정원도 정해져 있지 않아 유동적으로 충원하는 시스템이다. 파브리카에서는 포트폴리오만을 보고 '트라이얼'에 참가할 사람을 선정한다. 트라이얼이란 1년간의 초청을 받기 전에 2주간 파브리카에 초대되어 역량을 평가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파브리카에 1년간 초대돼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사진,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과에서 따로 또 같이 활동하게 된다. 이들은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이 실제 작업과 연구, 토론, 워크샵 등을 통해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소통을 이뤄내고자 노력한다.
파브리카의 도서관
▲창의성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2가지 키워드는 '남다른 시각'과 '소통'=파브리카의 프로젝트 디렉터로 활동하는 알피오 포조니(Alfio Pozzoni) 씨는 "앞만 똑바로 바라보면 한 면 밖에 보지 못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며 "남다른 시각이야말로 파브리카의 기본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프로젝트를 작업할 때마다 매번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시작한다. 기존의 방법과 주어진 길 대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알피오씨는 "이런 방식으로 현장에서 직접 맞부딪히고 체험하는 것이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파브리카에서는 '남다른 시각'이 빛을 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인종, 종교,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선 '소통'이 창의성을 발현시키는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조건은 '다양성'이다. 이곳에는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분쟁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지역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문화적인 배경과 시각을 가지고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젊은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역동성(dynamic)'이 생긴다. 이 역동적인 환경, 한계를 두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정해진 틀 자체가 없다보니 각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서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새롭고 엉뚱한 생각이 곧잘 튀어나온다. 파브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연구원인 유남영씨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문 분야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려면 일단 서로 다른 시각을 이해해야 하고, 작업을 통해 소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씨는 "그 과정에서 같은 문화권에서 자라나 비슷한 걸 보고 배운 사람들끼리는 겪지 않아도 될 마찰을 더 많이 겪게 되지만, 이를 통해 더 나은 결과물이 만들어지곤 한다"고 설명했다. 트레비조(이탈리아)=이상미 기자 ysm1250@<ⓒ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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