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연재 씨.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으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미련했어요?
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황보다 억울해 죽겠다는 소리를 생판 남인 은행 직원 앞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처지인 게 더 안쓰러웠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게 생겼건만 딱히 붙잡고 통곡할 사람 하나 없었으니까요. 그간 그처럼 아끼고 살았으니 친구도 변변히 만났을 리 없고, 상사에게 처절하게 당해도 편들어주려고 나서는 동료 또한 없는데다가, 더욱이 만년 소녀 같은 철없는 어머니(김혜옥)야 의논 상대가 될 리 없으니 말이에요. 어디다 속내를 털어 놓을 길이 없는 연재 씨는 결국 아버지 산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요. 그토록 딸이 빚은 만두 하나를 드시고 싶어 하다가 끝내 마지막 소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기셨던 말씀, 기억날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며 더 많이 먹어두는 건데,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사랑한단 얘기도 더 많이 하고. 연재야, 넌 이 아빠처럼 살지 마.” 그럼에도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십여 년을 보낸 후 아버지 앞에서 “남들은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주고 그러던데 왜 아빠는 하필 암 같은 걸 물려주느냐,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라고 악에 받힌 원망을 쏟아놓게 된 연재 씨.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던 연재 씨가 왜 그런 미련한 삶을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더 기막힌 건 급기야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하고 난 다음이었어요. 건강이 나빠져 최근 체중이 많이 줄긴 했다지만 안경을 벗고 새 옷을 입고 머리며 치장을 한 것만으로도 지나가는 남자들이 돌아볼 정도의 외모가 된 거잖아요?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냐고요. 금융기관에서 표창장을 줘야할 만한 소비습관이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고 가꾸는 데에도 현명하게 투자를 했다면 상사가 그렇게 대놓고 멸시와 질책을 할 수는 없지 싶어요. 연재 씨가 허비한 십여 년의 세월이 너무 아까워서 이번엔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났어요. <H3>연재 씨의 버킷 리스트를 보는 순간 뜨끔했습니다</H3>또박또박 자신있게 쓴 버킷 리스트처럼 앞으로 남은 시간 사랑도 연재 씨를 위해서 하세요.
그리고 그 화살은 자연스레 어머니를 향하게 되더군요. 하나뿐인 딸이 그렇게 사는 동안 어머니는 뭐하셨대요? 솔직히 연재 씨가 악착같이 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 어머니 때문이 아닌가요? 평생 부모며 남편 그늘 아래 살다가 이젠 딸을 남편처럼 의지하며 사시게 된 어머니가 연재 씨에게는 책임이자 의무였을 게 분명하니까요. 눈치는 왜 그리 없으신지 딸이 급작스레 살이 빠졌어도 나 몰라라, 평생 안 하던 여행을 떠나도 나 몰라라, 철없는 선물 타령에 특히나 딸이 떠나 있는 동안 집은 난장판에다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미뤄뒀다는 사실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연재 씨 못지않게 저도 울화가 치밀더라고요. 가장 한심했던 건 살뜰한 위로와 간호를 받아야할 시한부 인생의 딸이 환갑도 안 된 어머니의 노후 대책을 마련해두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연재 씨가 버킷 리스트에 적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 첫 번째 항목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하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뜨끔하더군요. 연재 씨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라고 써내려가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는데?’하며 심드렁하니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홀로 지내시는 양가 어머님들 생각을 며칠 씩 안하고 지내는 적이 허다한 제가 어찌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고졸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만든 무능한 어머니를 끊임없이 원망도 할 법도한데 원망은커녕 혼자 남으실 어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걱정하는 연재 씨의 마음 씀씀이가 태산처럼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요. 어떤 삶이 현명한지는 정답이 없지 싶어요. 아끼고 또 아끼며 살든, 턱없이 즐기며 살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만이 후회를 덜 남기겠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의 원망을 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연재 씨의 삶은 꽤 괜찮은 삶입니다. 앞으로 정말 6개월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좀 더 이어질지, 어느 누구와 어떤 인연을 맺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좋은 사람으로 살아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발,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