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요한노트

<div class="blockquote">두 개의 마주선 거울에서는 괴물이 튀어 나온다. 그래서 KBS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시청자들이 김요한과 마주하는 순간, 거기엔 괴물이 자라난다. 요한은 드라마 안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당이지만 밖에서는 곳곳에 숨겨진 암호를 푸는 해결사로 기능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내밀한 상처를 들추고, 아이들의 참았던 비밀을 갈구하고, 아이들을 원하는 만큼 이해하고 싶은 시청자의 욕망과 요한의 게임 사이에는 꼭 권총 한 자루 만큼의 거리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이 총을 빼앗기고 감금되는 순간, 아이들의 상담이 중단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내면의 괴물을 확인한 시청자들을 위해 요한의 상담노트를 공개한다. 전지적 요한시점에서 작성된 이 노트에는 요한이 알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들의 진짜 얼굴이 담겨 있다. 물론 괴물중의 괴물, 제작진의 능력에 의해 이 노트의 방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 남은 2회가 방송되기 전까지 아이들에 관한 최종 결론은 보류해 두기로 하자.
잠깐, 우리 5분만 침묵해 볼까. 넌 그냥 카메라잖아. 네 역할은 지켜보는 거야. 네 이야기를 부추기거나 네 불안함을 말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봐. 어때? 음정도 없고 리듬도 없는 카우벨 소리가 들리지 않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하지만 너에게만은 필사적인 그 종소리 말이야. 제 때 적당히 한번 흔들기만 하면 너는 네가 상처 입은 얼룩말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어. 그리고 사자는 너를 주목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상관없잖아. 넌 상처입고 피를 흘려도 사자에게 달려드는 타입이니까 말이야. 엄청 맞더라도 달려들고 보는 거야. 힘들지? 힘내. 넌 참 대단해. 넌 너를 임신했을 때 심한 열 감기에 걸렸던 엄마를 원망할 수도 있었어. 네가 아닌 박무열을 향해 웃어주는 은성이를 미워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너는 모두를 용서하지. 너를 괴롭히는 조영재에게 가장 성의 있게 대꾸해 주는 건 바로 너야. 상처의 바다에서 물방울 하나를 어떻게 건지겠나. 어차피 상처 입은 몸, 사자가 아닌 누구라도 너를 위협할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아직도 말하고 듣는 것이, 장애가 부담스러우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지 않는 건 용감한 게 아니야. 모두가 기뻐할 때 혼자 계단에 앉아 울면서 손을 뒤로 숨기는 건 옳지 않아. 사람들은 네 이야기가 다 들리거든.
아이야, 꿈을 꾸니? 게임기를 훔쳤을 때는 너그럽던 엄마가, 라면도 안 먹이고 옷은 꼭 손세탁해서 입혔던 엄마가, 겨우 밥을 안 먹겠다는 투정에 어린 너를 속옷 바람으로 내몰았던 그 밤이 너의 악몽에서 떠나질 않니? 그래서 너는 두렵구나. 어둠 속에 도사린 귀신이 무섭고, 한결같은 마음을 바랐던 네 희망이, 귀신처럼 나타나는 강미르가, 네가 감히 바랄 수 없을 만큼 귀한 은성이가 너는 두렵구나. 텅 빈 학교를 헤맬 때 너는 난간을 긁어 공포가 다가오는 소리를 지우지. 그래, 네 마음은 편안해 졌니? 하지만 아이야, 들리는 것이 전부는 아니란다. 밤마다 네 죄를 주님께 고해바치던 엄마의 기도, 누구도 너를 믿지 않는다는 네 목소리는 이제 잊어버리렴. 강모의 인공와우에 그랬던 것처럼 철썩 막대자석을 붙여서 고장 내 버려. 나에게 병이 나아 다행이라며 웃어주던 네 얼굴에 비참한 미움을 물들인 건 바로 너란다.
너는 말했지. 태어날 때부터 고장이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장애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너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걸까? 좌뇌에 문제가 있어 감정을 덜 느끼는 너는 어딘가 고장이 난 걸까? 봐,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리려고 누군가 공들여 전달한 편지를 너는 어떻게 해 버렸지? 모두가 공포와 혼돈에 빠져 있을 때 너는 리만 방정식을 생각했어. 뇌 속에 도파민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너는 괴물이야. 편지를 쓴 범인을 알아냈을 때, 너는 전기 충격기를 만들었어. 아이들에게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거니와 그 충격기를 사용하지도 않았지. 너에게 중요한 건 네가 알아낸 답이 만들어낼 파장이 아니라 네가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더라도 사회라는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괴물을 벌해야 한다고 말한 건 너야. 거울을 봐. 거기 네 표정이 어떠한가. 넌 눈앞의 너를 지워버렸어. 웃어야 할 때 웃지 않고 울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 너는 괴물이야. 누가 너를 위해 웃어주고, 울어줄까. 사람들은 천재를 동경하지만, 동정하지는 않거든. 웃는 걸 보니 흥미가 생긴 모양이로군. 그래, 밥부터 먹자. 생각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할거야.
구석에서 그만 나와. 넌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 긴장이 좋은 것뿐이잖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낙하해 버리는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 말이야. 넌 미치도록 학교에서 달아나고 싶어 했지. 그래서 탈출을 위한 네 공연을 망쳐버린 누군가를 지독하게 원망도 했을 거야. 하지만 넌 이미 도망가기엔 늦었다는 걸 알고 있어. 해변의 귓가에 음악이 흐르고 입속의 눈으로는 사슴의 표정을 읽지. 현수, 정태와 마지막으로 합주를 한 건 기억조차 나지 않을 거야. 약을 먹고 취했을 때나 이어폰을 꽂고 웅크렸을 때나 너의 목소리는 달라지지 않아. 올 누드의 남자 귀신이 자꾸 쫓아다니는 꿈속이 차라리 편안할지도 모르지. 다섯 살 때, 납치당한 그 방에서 넌 뭘 생각했었니? 거기서 나가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다짐했었니? 그걸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소용없어. 납치당하듯 학교로 잡혀 들어온 너는 자유의 날을 생각하며 너의 미래와 각오를 다졌지. 하지만 그게 진짜 너의 미래고 각오라고 넌 장담할 수 있을까. 방 한가운데로 나와. 더 불러도 이모는 오지 않아. 파란 얼굴로 구석에 앉아만 있어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어. 빨간 후르츠링을 골라내듯 네 안에서 답을 찾아. 어디에서 나올까, 그건 의미가 없어. 어디로 향해갈까, 그걸 말해 봐.
아닌 척 해도 넌 나를 무서워하지. 그런 점은 귀엽기도 해. 어때? 좀 달콤한 기분인가?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 같지 않아? 그래, 그렇게 공포와 불쾌함을 그대로 즐겨. 그래야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좋은 사진이 나올 거야. 넌 기억되기 좋은 분위기를 가졌거든. 비밀의 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말이야. 거기 들어 있는 게 뭔진 몰라도 그 방의 크긴 대충 짐작이 가. 흔한 일이었을 거야. 작은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큰 거짓말을 하고, 작은 죄를 없애기 위해 큰 죄를 지었겠지. 대체 왜 네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을까. 알고 보면 너도 착하고 밝은 아이로 태어났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나, 그건 모든 인간사의 비극인걸.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시절은 영원하지 않지. 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점점 커져가는 비밀의 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유리창에 썼다 지우듯 누군가에게 살짝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할 테지. 하지만 네가 입을 여는 순간, 모두가 그걸 알게 될 거야. 사람들은 계속해서 널 지켜보고 있거든. 네 USB가 어디에 있나 감시하고, 널 몰래 사진으로 기록하니까. 피 흘리지 않고 상처를 꿰매겠다는 네 희망은 가망이 없어. 비웃음 당할만 해. 그러니 꼭꼭 숨겨. 아니, 그 비밀로 부터 네가 꼭꼭 숨어야 할 거야. 머리카락이 보이거든.
이과생이라고 했나. 유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그건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일까? 유기체가 아닌 것의 형태를 믿어도 되는 걸까? 넌 너를 유령에 비유했어. 그건 이과생답지 못한 생각이야. 애초에 이과를 선택한 건 너의 희망이었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엄마가 원한 건 아니었고? 곰곰이 생각해 봐. 엄마의 초장기 프로젝트에서 네가 도망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야. 샘플이 망가지면 실험은 중단되게 되어 있거든. 하지만 넌 샬레 밖으로 감히 발을 뻗을 생각을 못했겠지. 그래서 하늘은 네 엄마를 도운 거야. 네가 입학할 수 있도록 죽어준 아이의 일기장에서 넌 유령을 만드는 아이들을 보았지. 하지만 그건 네가 일기장 밖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야. 우등생 역할이 끝난 너는 주눅 들고 구질구질하고 청승맞은 얼굴로 학교를 배회했겠지. 네 자리를 유령이 차지하게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해? 이 난리통에 아이들은 네 얼굴과 이름을 알았지. 그래, 이제 친구와 우정이 생겼다고 느끼나? 너는 유령이 차지한 자리를 돌려받은 것 같아? 네가 무릎 꿇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닐 거야. 억울하겠지만, 그런 게 선택에 대한 책임 아니겠나.
비난 받을 준비는 되었나? 죄를 선택했다면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너는 말했어. 그리고 너는 죄를 선택했지. 매뉴얼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넌 스스로 문을 열지 못하는 악마를 초대했어. 그것도 두 번이나. 최치훈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그 아인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을 완벽하게 구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때? 분노가 치밀지 않아? 나에게 검은 편지를 가져 왔을 때 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미워한다는 게 쉬운 감정은 아니라고 했어. 그건 네가 증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얘기야, 그렇지? 환자를 살려내고 잠시 아버지처럼 의사가 된 기분이었겠지. 하지만 네가 살린 건 나였어. 최치훈이 모두를 위해 구조탄을 만들고 화제 경보를 울리는 동안 넌 악당을 구했다고. 그래서 너는 모자란 너를 증오할거야.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거야. 엄마 대신 살아난 소년, 은성이의 어둠을 외면한 소년. 너를 변호해. 네가 선택한 것들은 죄가 아니었다고 말해봐. 네가 가진 단 하나의 네 편을 다른 사람의 목에 걸어 두지 마. 운이 없게 부러진 연필은 다시 깎아서 쓰면 되는 거야. 죄는 불운의 것이라고 말해. 참, 만들어 준 죽은 잘 먹었어. 딸이 있었다면 자네 같은 사위를 얻고 싶었을 거야.
넌 다른 아이들과 한참 달라. 훨씬 대중적이고 자극적이지. 미친 용 한마리가 온 하늘을 휘저어 놓는 것 같아. 그래서 너에게 잠깐 당하고 말았어. 하지만 난 이미 내 삶의 대부분을 포기했어. 시체가 주사 맞는 걸 두려워하겠니? 하지만 넌 조금 만족하고 있을 거야. 어쨌든 넌 악당을 제압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성공 했으니까. 강미르 청춘의 한 페이지에 삽입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야. 넌 모두가 널 봐주길 원해.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네 흔적을 여기저기 껌을 뱉어놓듯 흘리고 다니지. 모두가 널 보느라 누군가의 꿈을 짓밟았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넌 계속해서 사람들을 홀리지. 하지만 넌 모두가 너를 보는 대신 너를 만질 수 없게 만들었어. 마치 유리장 속의 돌고래처럼 말이야. 그렇게 혼자서 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어. 당사자도 모르게 너는 증오를 키우고 있지만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지. 너보다 주목받는 자인가. 너를 주목하지 않는 자인가. 둘 다 해당되는 사람을 알고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글. 윤희성 nine@ 편집. 장경진 three@ⓒ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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