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사이를 내달리 던 자동차 경주자동차 경주의 첫 우승자가 달린 거리는 80마일(약 129km)에 불과했다. 300km가 넘는 거리를 주행해야 하는 현재의 F1경기에 비해하면 3분의1 수준이다.초기 자동차경주는 지금의 랠리 경주와 비슷했다.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달리는 방식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경주 전용 서킷이 없었던 만큼 자동차는 각각 출발해 주행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대표적인 경주가 1896년 프랑스자동차클럽(ACF)이 주최한 파리와 마르세이유 왕복 경주였다. 1897년부터는 경주차와 일반 자동차가 구조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엔진개발에 몰두해 더욱 강력한 엔진을 만들어냈고, 전문 드라이버들은 흙받기나 시트 쿠션처럼 주행과 관련없는 부품을 떼어내 무게를 줄이기도 했다.경주차의 출력이 상승하면서 두 가지 상반된 변화가 나타났다. 과거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된 만큼 위험이 증가해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처음 벌이진 레이스 사고는 1898년에 일어났다. 프랑스 파리와 니스 사이를 달리는 레이스 출발 직후 벤츠 드라이버 드 몽타리올과 그의 친구 드 몽테냐크 후작의 충돌 사고가 벌어졌다. 두 선수는 다치지 않았지만, 미캐닉이 머리에 부상을 입고 세상을 등졌다. 사고의 여파는 곧 여러 곳으로 퍼져 여타 자동차경주마저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파리경찰청이 압력을 가해 파리와 암스테르담 구간 경주를 중지시키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이버들의 강력한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레이스에 출전하는 자동차들을 기차 편으로 파리경찰청 관할구역 밖으로 옮겨 경주를 치렀다. 1900년대 초반에는 독일이 주관한 고든 베네트 레이스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여기에 출전한 프랑스 팀들이 ACF 그랑프리로 발길을 돌려 1906년에 종말을 맞았다. 이밖에 새로 시작된 경주도 자리를 잡아 나아갔다. 특히 1903년 ACF가 주최한 파리-보르도-마르세이유 경주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났지만, 레이스를 중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자동차 회사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이후 자동차경주에는 도로 양쪽에 관중 보호를 위한 방호벽을 만들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 해야 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1920년대 대공항 속에서 발전한 모터스포츠 ACF가 세계 최초의 그랑프리(Grand Prix)를 주관한 이후 유럽 강국들은 레이스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1907년에는 영국 서리 주 브랜우즈에 처음으로 서킷이 등장했다. 하지만 곧 유럽모터스포츠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경제불황에 이어 레이스 규정에 대한 이견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09년 레이스를 보이콧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이 시기에 미국 모터스포츠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1909년부터 지금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디애나폴리스 모터스피드웨이도 이 때 문을 열었다. 주행거리가 짧은 1~2마일(1.6~3.2km) 오벌트랙(타원형 트랙)은 서킷 전체를 관망하는 것은 물론 레이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유럽 모터스포츠에는 개혁의 바람이 밀려든 때는 경제불황이 지나간 1911부터였다. 삼각형 모양의 서킷이 등장해 여러 형태의 코너가 생겨났고 다양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이 여파는 단순히 출력 경쟁에 머물던 경주차 개발에 영향을 미쳐 디자인과 엔진, 브레이크 성능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914년에는 경주차의 기본적인 틀이 완벽하게 마련되돼 이후 수십년 동안 이 분야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모터스포츠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상당한 기술과 지식을 축적한 유럽 기술진은 이를 밑거름 삼아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1921년 프랑스 르망에서 열린 ACF 그랑프리에서 미국계 드라이버들이 유럽파를 누르고 경기를 휩쓴 것이다. 이탈리아가 유럽 레이스를 평정했고, 기술면에서 유럽과 미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예로 미국에서는 슬림형 밀러 122와 같은 경주차들이 고속 트랙인 스피드웨이를 달리기 위해 개발된 반면 유럽에서는 피아트가 고회전 엔진을 개발해 무게가 가벼운 805 섀시에 얹었다. 1920년대 후반의 대공황은 유럽의 모터스포츠에 타격을 주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의 미국에서는 자동차클럽(AAC)이 인디애나폴리스에 포뮬러를 도입했다. 자동차 메이커들을 레이스 트랙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비책이었다. 대공황이 서서히 걷히던 1930년 들어 이 작전의 효력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유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대공황은 모터스포츠계가 도약할 수 있는 시험장이 되었다. 아킬레 바르지, 루이 쉬롱, 루돌프 카라치올라와 당시 최고 드라이버였던 타지오 누볼라리가 주름잡던 시대였다. 이 드라이버들은 타르가 플로리오와 1000마일이라는 뜻의 밀레 밀리아 등과 같은 고전적 레이스에서 실력을 겨루었다.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로마를 왕복하는 산길을 달리는 획기적인 경주였다. 이 시대 최고의 선수들은 각기 자국 메이커 소속으로 출전했다. 누볼라리는 알파로메오, 카라치올라는 벤츠, 쉬롱은 부가티였다. 이들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5년에 걸쳐 세계 모터스포츠 정상을 이끈 주역이었다.
◆세계전쟁을 발판삼아 F1 월드 챔피언십으로 도약 1933년 1월,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는 고속 자동차 마니아였다. 그는 모터스포츠를 나치 선전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은 독일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소무게가 750kg인 새 포뮬러 머신을 개발했다. 나치정부의 이러한 지원은 국민을 선동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경주차의 기술과 출력을 개선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뒀다. 또한 독일 팀들이 이 시대의 자동차경주를 휩쓰는 디딤돌이 됐다. 벤츠 W25와 아우토우니온 타입A는 1934년 베를린 아부스 서킷에 등장한 동급 최강의 경주차였다. 1934년 레이스는 벤츠 팀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이듬해 모터스포츠는 아우토우니온이 벤츠를 따라잡았다. 라이더 출신 로제마이어가 핸들링을 개선한 타입 B를 타고 서킷을 지배한 것이다. 독일 독점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인 1948년 들어 자동차경주는 재정비를 통해 2년 뒤부터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F1 월드 챔피언십 그랑프리의 출범이다. 지선호 기자 likemo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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