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수기자
유일한 박사(가운데)는 1968년 3월 제2회 세금의 날에 모범납세인으로 선정돼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br />
◆정직과 신뢰로 '좋은 제품'을 만들라유 박사는 우리 동포의 건강ㆍ보건의 증진을 위해 기업을 경영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라 사랑의 길이라 확신했다. 이런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체 배척했다. 유한양행이 만주를 비롯해 중국 동북부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판매 활동을 하던 1930년대, 시장조사를 하던 한 간부가 헤로인과 모르핀을 판매하면 큰 이익을 올릴 것이라 보고했다. 이에 유 박사는 "나더러 아편 장사를 하란 말인가. 자네는 도대체 지금까지 우리 회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당장 사표를 쓰게"라며 크게 화를 냈다. 단기적인 이익을 주지 않더라도 '좋은 제품'을 팔아야 한다는 유 박사의 가치관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졌다.◆유한양행은 '나의 기업'이 아니다.1936년 유일한 박사는 기업공개를 결정한다. 당시로선 매우 획기적인 결정으로 우리나라 두 번째 기업공개였다. 유 박사를 포함, 종업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로 등재됐다. 상당수 주식을 종업원에게 공로주 형태로 배분한 것이다. 유 박사가 지닌 '기업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종업원의 소유'라는 신념의 결실이었고, 훗날 국내기업 최초 종업원지주제 시행의 단초가 된다.경영이념에 내세웠던 '기업은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신념을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으로 실천했는데,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철학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는 생전에 가지고 있던 유한양행 총 주식 40%를 각종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등 이윤의 사회환원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이윤추구는 기업성장의 선행조건이지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열린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가운데)
◆교육사업으로 기업이윤 환원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인 1954년. 그는 염원하던 교육사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윤의 사회환원을 실천한다. 사재를 들여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고, 60년에는 한국직업학원, 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 66년 유한중학교를 설립했다. 유 박사는 시간만 나면 유한공고를 찾아, 어린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훌륭한 사람이 돼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별세하기 몇 달 전까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학교를 둘러봤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학생들과 그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애정이 컸던 것이다.◆기업의 주인은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유 박사는 사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완성했다. 유언장에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와 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 유한동산 조성용 토지 5000평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고 명시했다.사후까지 변함없는 사회공익사업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재단 설립 목적 자체가 항구적 사회공익사업을 펼쳐가기 위한 것인 만큼, 유언장은 유 박사의 신념이 응축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그는 기업을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업의 주인은 사회이고 기업가는 이를 맡아 관리하는 것뿐이라 했다. '청지기' 정신을 실현한 사람이라 평가 받는 이유다. 청지기는 일과 재산을 맡아 관리할 뿐이며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노력해야 하는 일꾼이다.그는 재물의 소유보다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일의 의미는 인간적 가치를 높여 주는 데 있다고 믿었다. 일다운 일을 하면 돈은 따르는 법이며, 일은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에 그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입은 적고 돈벌이는 잘 안 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한 봉사의 뜻을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신범수 기자 answe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