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사명(社名)에 담긴 한국경제 뒷이야기
[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제약산업은 가장 먼저 태동한 제조업 중 하나다. 그만큼 업체들의 역사도 길고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그들의 사명(社名)을 살펴보면 1900년대 초반에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산업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제사의 흐름도 엿볼 수 있다. 심오한 의미에서부터 알고 보면 단순한 사연까지 흥미진진한 제약사들의 이름 속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일제시대, 독립 넘어 글로벌 꿈꾸다우리나라 최초의 제조업체 동화약품(1897년) 사명에는 열강들 사이에 끼어 고통받던 민족을 향한 애정이 묻어있다. 동화(同和)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基利斷金) 시화연풍 국태민안(時和年豊 國泰民安)'에서 유래됐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는 의미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동화약품은 상해 임시정부와의 비밀 연락기관인 연통부를 사내 설치하고,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며 "기업은 민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기업 철학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말했다.유한양행의 사명도 독립의 소망을 담고 있다.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애초 이름은 '유일형'이었는데, 영어로 쓰기 쉽게 개명하면서 '하나의 대한제국'이란 뜻의 '일한(一韓)'으로 정했다. 이후 제약사를 창업하고 회사명을 유한양행이라 했다. 일찌감치 글로벌 진출을 노린 사명도 눈에 띈다. 1932년 창립된 동아제약이 대표적이다. 당시만 해도 '동아시아'는 '세계'를 뜻하는 단어여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제약사가 되겠다"는 뜻으로 정했다고 한다. 동아제약은 현재 업계 1위로 다수의 신약을 개발, 글로벌 제약사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세계시장의 꿈을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 회사도 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1987년 창업하면서 업계 유일하게 사명을 영문으로 짓고 '한국 최초의 다국적제약사'를 표방하고 나섰다.
◆엇? 한국 제약사가 일본에도 있네다른 산업부문과 마찬가지로 우리 제약산업도 발전기를 거치며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술이나 제품을 도입하는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약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경우가 종종 있다. 중외제약의 중외(中外)를 일본어로 읽으면 '쥬가이'다. 일본에 '쥬가이제약'이 있다. 쥬가이제약은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사무소를 설치했는데, 패전 후 사무소를 현 중외제약 창업주인 고 이기석 사장에게 매각했다. 이 사장은 '조선중외제약소'라 이름을 고쳤다. 양 사는 1992년 신약연구소를 공동 설립하는 등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신종플루로 한창 주가를 날리고 있는 녹십자의 명칭도 일본에서 왔다. 일본 녹십자(미도리쥬지)는 당초 혈액은행에서 출발해 알부민과 같은 혈장분획제제를 파는 기업이었다. 이 회사가 한국의 극동제약에게 혈액제품 제조기술을 이전해줬고, 고 허영섭 회장은 이를 계기로 일본 녹십자의 양해를 얻어 1971년 사명을 아예 '녹십자'로 바꿨다. 녹십자가 제약회사 이름 같지 않고 대정부 업무를 많이 진행한다는 이유로 '정부 산하단체' 아닌가 오해도 사지만, 전혀 상관없다. '적십자'와도 무관하다.
◆'한O'약품이 유독 많은 이유한독약품, 한미약품, 한일약품 등 '한O'란 사명은 해당 국가 제약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1954년 설립된 연합약품은 1964년 독일 훼히스트(Hoechst)와 합작하며 독일의 '독(獨)'자를 따 한독약품으로 바꿨다. CJ로 인수돼 지금은 사라진 한일약품도 원료와 제품 대부분을 일본서 수입한다는 의미로 '한일'이라 사명을 지었다. 한미약품은 사례가 조금 다르다. 임성기 회장이 1973년 창업하며 '한미약품'이란 작은 회사를 인수했는데, 이 회사가 미국 업체와 합작관계였다. 인수와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를 청산했지만, 회사명은 그대로 사용했다. 한미약품은 "미국 제약사와 관련있다"는 이미지를 벗고 싶어 회사명을 절대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삼성'의 원조는 '삼성그룹'이 아니다대기업 명칭과 사명이 동일해 혼선을 주는 제약사도 많다. 삼성제약이 대표적이다. 삼성그룹의 전신 삼성상회가 1938년 생겼으니 1929년 설립된 삼성제약이 '삼성'의 원조인 셈이다.삼성제약은 연 매출 400억 원 수준의 영세 제약사지만, 발포성 소화제 원조 '까스명수', 뿌리는 살충제 원조 '에프킬라', 우루사보다 먼저 개발된 웅담성분 간장약 원조 '쓸기담' 등 다수의 '원조'를 보유하고 있다.한화제약 역시 한화그룹과 무관하다. 한화제약은 1976년 설립됐고, 한국화약이 지금의 '한화'로 바뀐 게 1992년이다. 대우제약과 현대약품도 대우그룹, 현대그룹과 무관하지만, 사명은 대기업들이 먼저 썼다.대기업과 이름이 같은 제약사들은 '그룹 자회사'가 아님을 애써 홍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자신들이 원조든 아니든 대기업 후광에 기업 브랜드 가치가 덩달아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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