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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담(手談)] 바둑 역사상 최강 여기사, 루이 9단 받아준 한국의 한 수

수정 2022.11.28 08:47입력 2022.09.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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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이창호, 이창호, 조훈현, ○○○, 조훈현, 이창호, 이창호.’

1996년부터 2003년까지 ‘국수전’ 우승자 명단이다. 국수전은 1956년 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바둑 기전이다. 국수(國手)라는 단어는 나라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을 의미한다. 역대 국수전 가운데 2000년 국수전 우승자 ○○○에 관심이 쏠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국수전은 2016년 제59회 대회까지 이어졌는데 우승은 ‘거의’ 남성이었다.


세계 메이저 바둑 대회를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다. 4강권은 남성 일색이었다. 단 한 명의 예외만 빼고…. 그 주인공은 바로 2000년 국수전 우승자인 루이나이웨이 9단이다. 이른바 ‘철녀(鐵女)’로 불리는 인물. 그는 역사상 최고의 여성 바둑기사로 불린다.


루이의 업적을 살펴보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 간 여자 기사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의 조혜연 9단과 박지은 9단이 도전했지만, 루이의 벽은 높고 단단했다. 전성기 시절의 루이는 세계 최강 남자 기사들도 긴장하게 할 정도였다.


[수담(手談)] 바둑 역사상 최강 여기사, 루이 9단 받아준 한국의 한 수 조훈현 9단과 대국을 하고 있는 루이나이웨이 9단(사진 왼쪽). [사진제공=한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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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의 메이저 세계바둑 대회 4강도 그의 업적이다. 어떤 여자 기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1992~1993년 열린 제2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대회. 루이는 예선전에서 이창호 9단까지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바둑계의 살아 있는 전설, 루이는 원래 중국 상하이 기원 소속이었다. 하지만 중국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 장주주 9단이 1989년 천안문 시위에 연루된 것도 변수로 다가왔다. 루이 부부는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일본을 떠돌던 루이는 199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위촉되면서 한국에 정착했다.


루이는 일본기원 소속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기원 쪽에서 합류를 거절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특히 일본 여자 기사들이 세계 최강자의 합류를 부담스럽게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한국기원은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여자 기사들도 루이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이는 한국 여자 바둑의 역량을 증진한 결정적인 한 수였다.


루이는 2011년까지 국내 여류 기전을 휩쓸었다. 한국 여자 기사들은 수많은 패배를 경험했다. 그 쓰라린 시간은 값진 경험이었다. 루이는 나침반 같은 인물이었다. 루이라는 존재 자체가 롤 모델이자 넘어서야 할 목표였다.


루이라는 최강자와 맞서기 위해 더 연구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약점을 보완하고, 더 강한 힘을 길러야 했다. 이는 한국 여자 바둑의 풍토를 바꿔 놓았다. 루이는 2011년 말 중국에 복귀했다. 루이는 떠났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보며 자랐던 바둑 꿈나무들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루이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세계 최강의 여자 기사 타이틀은 어느새 한국 기사(최정 9단)의 차지가 됐다. 한국 여자 바둑은 강해졌다. 지난달, 제5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 대회 4강에 오른 인물 중 3명이 한국의 여자 기사다.



현실에 안주하며 편안한 길을 가고자 했다면 그런 결과가 가능했겠는가. 눈앞의 실리를 좇기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포석, 오늘날 한국 여자 바둑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배경 아닐까.




류정민 문화스포츠부장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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