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안정형 평가지표…'대출같은 투자' 내몰려
"성과관리 장기·목표지향형으로 재설계해야"
출자자 담당자 2~3년마다 바뀌는 것도 문제
한국에서 스타트업 투자를 진행 중인 외국계 VC A사 대표의 말이다. 그는 "한국 벤처 펀드의 투자 및 회수 기간 자체가 일반적으로 해외에 비해 짧다"며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수 없는 분야의 기업들도 몇 년 만에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에 오히려 부작용을 겪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손실이 곧 정책 실패' 프레임…모험 가로막는 KPI
국내 벤처투자 자금이 후기·안정형 포트폴리오로 수렴하는 '뱅킹(banking)형' 모델에 가깝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로 핵심성과지표(KPI)를 비롯한 '운용 규칙'이 꼽힌다. 벤처펀드 운용사(GP)와 출자자(LP)의 방향성이 평가 논리에 좌우되면서, 벤처투자가 기본적으로 떠안아야 할 '실패 가능성'을 축소하는 게 펀드의 최우선 목표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국내 벤처투자 생태계는 통상 자금을 대는 출자자가 GP의 성과를 KPI로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차기 펀드 운용권을 배분하는 구조다. 문제는 운용 과정에서 조성액·집행률·회수(엑시트) 실적 등 정량 지표가 KPI의 중심축으로 작동하기 쉽다는 점이다. 민간 펀드의 손실은 '투자 실패'로 정리될 수 있지만, 정책 펀드의 손실은 '정책 실패'로 해석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의 KPI 잣대가 '단기 안정형'으로 설계될수록 평가받는 VC 등 GP들은 자연스럽게 후기·저위험 투자로 내몰리게 된다.
현장에선 이 같은 압력이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내부 의사결정 단계에서부터 작동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VC와 액셀러레이터(AC) 등에 1년 단위 실적을 요구하고, 그 평가에 따라 이듬해 예산과 인센티브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극초기 스타트업 투자에도 단기 매출·성장 지표를 요구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에선 찾기 힘든 국내 VC 업계의 특징이다.
"VC별 특색 사라져"…'장기·목표 지향형' 성과지표 주목
지난해 모태펀드 출자사업 GP로 선정된 B사 대표는 "VC로서는 당연히 출자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손실이 부각될수록 재위탁 평가나 차기 펀드 결성 과정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부담이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그 부담도 줄이려다 보니 초기·딥테크처럼 불확실성이 큰 영역일수록 한 스타트업에 여러 VC가 뭉쳐 투자하는 '클럽 딜'이 흔하다"며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각 VC 고유의 색깔이나 전략을 내보이는 게 아니라 틀에 갇힌 사고로 스타트업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평가 체계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구본성 한국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선진국들은 미래 핵심기술의 선제적 확보와 장기 성장기반 구축을 위한 재정 기반 혁신펀드를 확대하고 있다"며 "이 같은 과제는 일반 프로그램과 달리 정성적 평가, 단계별 목표(마일스톤) 중심의 운영, 결과물 수준과 연계된 후속지원 등 차별화된 성과관리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연구 보고서는 "한국벤처투자와 같은 정책금융기관은 여전히 집행금액이나 보증 건수, 지원 대상 수와 같은 정량적 지표 위주로 성과를 관리하고 있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스케일업 투자를 가능하게 하려면 정책목표 달성 기여도와 수익성을 함께 평가하는 이중 KPI 체계로 개편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고 짚었다.
글로벌 사례를 보더라도, 미국의 중소기업투자회사(SBIC)·중소기업혁신연구(SBIR)와 영국의 BPC, 이스라엘의 요즈마(Yozma) 프로그램 등은 정부가 초기 위험을 흡수하고 민간이 성장 구간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조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켰지만, 한국은 여전히 '단일 재원, 단일 기관, 단기 집행' 모델에 머물러 있어 글로벌 스탠더드 대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트륨 이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며 상업화 물꼬를 튼 미국의 나트론에너지(Natron Energy), 장기 투자를 보장받으며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성장한 영국 데이터 분석 기업 콴텍사(Quantexa) 등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독일의 하이테크창업펀드(HTGF)도 정부가 손실의 60%까지 후순위로 부담하는 구조를 통해 인공지능(AI) 기반 피트니스 유니콘 EGYM 등 180건 이상의 엑시트를 성공시켰다.
"평가 투명성·전문성도 미흡…VC 선진 인프라 구축돼야"
'투명하고 전문적인 심사·평가 체계' 구축도 과제로 꼽힌다. 김현열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궁극적으로 시장 내에서 정보가 축적·공유되는 환경이 형성돼야 한다"며 "VC 전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공공기관 평가역량을 활용한 테크기업 가치평가 기준 설립, AC를 활용한 투자자문 서비스 시장 활성화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통상 출자심의위원회는 기관 내부 임직원(공무원급) 2인 이상과 외부 전문가 5인 등 7명가량으로 구성되는데, 외부 전문가 중 벤처 현업 출신이 적고 학계·관료 출신이 많다는 점도 업계 안팎의 지적이다. B사 대표는 "모태펀드 출자심의위원회 심사위원 대부분이 벤처 업계와 무관해 스타트업 성장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GP 선정 결과에 의문을 품는 VC도 많지만 지금으로선 공식적인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모든 개혁은 정책당국 의지에 달린 문제인데, 각 기관 담당자도 2~3년마다 업무가 바뀌는 구조"라며 "문제를 왜 고쳐야 하는지 공감하기보다는 '현재 기준에 맞춰 자금을 배분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는 관료적 태도가 혁신을 가로막는다"고 강조했다.
A사 대표는 "모태펀드 도입 초기엔 이러한 모델이 한국 벤처 생태계의 발전을 만들어낸 측면이 분명 있겠지만, 이제는 또 새로운 단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KPI를 비롯한 기관의 운영방식을 보다 선진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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