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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착한 국가 콤플렉스'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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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착한 국가 콤플렉스'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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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기존 철강 세이프가드 제도를 대체할 새로운 관세할당제(TRQ) 도입을 예고했다. 쿼터를 초과한 수입 물량에는 기존의 두 배인 50%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미국의 고율 관세에 이어 이제 유럽 철강 시장의 문턱도 높아졌다. 한국산 철강의 피해가 불가피하게 됐다.


우리 정부는 늘 '원칙'을 앞세워왔다.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을 존중하고, 보복보다는 협상으로 풀자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미국이 관세를 올릴 때도, 일본이 수출규제를 걸어올 때도, 유럽이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도입할 때도 그랬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도덕적 자부심이 있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가 혈맹국으로 여겨왔던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한국산 철강과 자동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동맹국의 팔을 비틀었다. 우리나라는 줄곧 '협력'을 외쳤지만 협상장은 언제나 미국이 먼저 판을 짜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건을 따지는 위치에 머물렀다.


EU의 이번 조치로 한국은 다시 협상장으로 끌려가게 생겼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도 아직 매듭짓지 못했다. 늘 뒤늦게 '피해 규모'를 계산하고, '예외 적용'을 요청하며, '대체 시장'을 찾는 식이다. 글로벌 무역 질서가 힘의 논리로 재편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착한 무역국'의 틀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협상에서 '내줄 것만 있는 나라'로 보여선 곤란하다. 우리는 그동안 관세를 방어용으로만 써왔다. 그러나 글로벌 패권국들이 관세를 '협상용 칼날'로 쓰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관세를 선제적으로 조정하거나, 특정 품목에 전략적 관세를 예고하는 것만으로도 협상 지형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무차별적인 보복은 위험하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관세 전쟁'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면전'과 '무대응' 사이에는 넓은 회색지대가 있다. 예컨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특정 품목에 대해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대응 관세를 검토하거나, 관세 인하 협상에 조건부 유예를 거는 식이다. 이런 전략적 대응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정상적인 협상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다. 상대가 힘을 휘두르는 만큼, 우리도 최소한의 방패와 창을 들 필요가 있다.


지금의 국제 무역 질서는 규범보다 힘이 우선한다. '좋은 나라'로 남는 것만으로는 국익을 지킬 수 없다. 정부는 통상정책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수세적 방어에서 벗어나 관세·보조금·투자·기술 등을 활용한 공세적 협상 전략이 필요하다. 방위산업이나 자동차, 배터리, 에너지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나 시장 접근을 재고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 탄소 감축, 핵심 광물 공급망 같은 글로벌 의제에서도 상호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참여 강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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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가 끝난 게 아니다. '착한 무역'의 시대가 끝났을 뿐이다. 이제 규범을 존중하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계산도 할 줄 아는 나라가 돼야 한다. 협상장에서 끌려다니는 대신 판을 짜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덕적 자부심이 아니라 전략적 냉정함이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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