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유치해 보이는 제목과 많이 본 듯한 캐릭터들에 대한 선입견은 화면을 켜자마자 사라졌다. 챙겨보아야 할 것이 쌓여있는데 이건 좀 뒤로 미루자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눈부신 흥행 성적은 차치하고, 'K컬처의 새로운 현상' '한국적 서사의 보편적 장르화' '재미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해외 언론 보도가 이어진다. 미국 음악잡지 빌보드의 기사는 상찬의 정점이다. "K팝이라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팝 문화 자체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세계적 화제를 넘어 새로운 문화 현상이 되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이야기다. 지난달 공개하자마자 넷플릭스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41개국 흥행 차트를 석권했다. K팝 아이돌이 퇴마사가 되어 악령을 물리친다는 설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주인공 헌트릭스는 낮에는 K팝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고 밤에는 세상을 위협하는 악령과 맞서는 데몬 헌터가 된다.
인기의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음악이다. 노래와 안무,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을 부르는 K팝 팬덤 문화가 영화의 전편에 자리 잡고 있다. 비행기에서 악령과 싸우는 헌트릭스의 '어떻게 하는지(How It's Done)'를 시작으로 사자 보이스의 '소다 팝(Soda Pop)'과 '골든(Golden)'의 완성도는 놀라운 수준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게 바로 그 소리야(...What It Sounds Like)'는 도입부와 절묘하게 연결되며 극적인 여운을 남긴다. OST는 빌보드차트에 8곡을 진입시키는 진기록을 세웠다. 애니메이션의 가상 아이돌과 실제 K팝 스타들이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다니….
여기에 한국의 전통문화와 대중문화가 구석구석 배치된다. 등장인물의 의상과 장식품의 디테일은 완벽하다. 서울 거리와 성곽, 김밥과 순대를 한 접시에 담고 대중목욕탕에서 피로를 푼다. 식사 전 냅킨 위에 수저를 올려놓는 장면은 디테일의 끝판왕이다. 케데헌을 본 외국인은 이제 '라멘(Ramen)'으로 읽지 않는다. 헌트릭스가 즐겨 먹는 '라면(Ramyeon)'이라고 정확히 발음한다. 주인공 못지않은 캐릭터도 있다. 민화 '호작도'에서 걸어 나온 듯한 파란색 호랑이 '더피'와 갓을 쓴 까치 '서씨'는 신 스틸러 이상의 역할을 한다. 민화를 재해석한 두 캐릭터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케데헌은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소재와 장르의 이종교배를 통해 익숙한 것으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과거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영화 '카사블랑카(1942)'는 할리우드의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재배치하고 뒤섞어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불러일으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케데헌 역시 마찬가지다. 한두 개의 클리셰(상투적 표현이나 설정)는 실소를 자아내지만 수많은 클리셰는 감동을 준다는 에코의 말을 실감한다.
지난달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1위에 올랐다. 이런 순위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왕자웨이 감독의 '화양연화(2000)'보다 한국 영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뽑았다. 시즌3로 막을 내린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프로그램이 되었고 이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워 보인다. 불평등한 사회를 풍자한 우화 또는 잔혹동화처럼 보이는 두 작품은 반지하, 전통놀이 등 사회적 단면과 다양한 문화를 작품 해석의 키워드로 이용해 주목받았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구태스러운 말이 새롭게 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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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데헌 제작진의 후일담. "미국인이 한국적인 장면을 좋아하길래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채웠더니 대박이 났다." 모든 좋은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재미있는 영화는 좋은 영화다. 적어도 대중문화에서는 그렇다. 충만해지는 '국뽕'을 참고 케데헌을 다시 봐도 재미있다.
임훈구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keygri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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