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보수 텃밭'…국민의힘 우호 감정
"탄핵 잘한 일"이라면서 책임은 민주당에
50대 중에선 이재명 지지 의견 밝히기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 일주일이 지난 11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의 신발가게. 이곳은 2022년 8월 윤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대구를 찾아 신발을 직접 구입한 곳이다. 60대 가게 주인은 "마음이 아프다"며 "제일 잘못한 사람은 윤 전 대통령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기권할 것"이라는 그의 말엔 허탈함이 묻어났다.
'보수 성지'로 꼽히는 서문시장은 선거철마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후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 하루 전 마지막 유세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금요일 정오 시간, 노점 수십 개가 일렬로 늘어선 칼국수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의 인기 메뉴는 단연 '칼제비'. 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음식으로, 서문시장의 명물이다.
활기찬 분위기는 원단을 취급하는 2지구 상가에서 바뀌었다. 섬유의 고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각종 원단부터 한복, 커튼, 침구류를 파는 상인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뭐가 필요하냐'며 발길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서문시장 상인들의 보수정당 지지세는 여전히 견고했다. 다만 세대별로는 정치 성향 차이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50년 넘게 남성복을 팔고 있는 김수남씨(83)는 "대통령 탄핵은 잘한 일"이라면서도 "윤석열이가 정치 경험이 없어서 (야당이) 발목 잡으니까 뿔났다. 계엄에는 민주당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40년째 옷 가게를 운영하는 60대 윤경호씨는 보수 지지자라고 밝혔다. "잘못했으니 탄핵당하는 건 당연하다"면서도 차기 대선과 관련해서는 홍준표 전 대구시장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윤씨는 "나라가 힘들 때 정치 경험이 많은 우리 홍 전 시장이 대선 후보가 돼야지"라고 말했다.
생활 건강용품을 파는 오찬섭씨(58)는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은 당연히 탄핵돼야 한다"면서도 "거대 야당에 이재명까지 대통령이 되는 건 위험하다"고 날을 세웠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을 지지한다고 밝힌 오씨는 "경선에서 탄핵 찬성파 1명과 반대파 1명으로 추려지면 좋겠다. 그 이후엔 누가 최종 후보가 되든 밀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시민들은 탄핵 인용에 불만을 드러냈다. 25년간 원단 장사를 해 온 이호석씨(68)는 "민주당이 30번 줄탄핵 쇼로 국정을 마비시킬 동안 대통령이 힘이 없어서 얼마나 괴로웠겠냐"고 안타까워했다. 이씨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의 대선 출마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이씨는 "한덕수가 대선에 나오면 보수의 위기도 단번에 극복할 수 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상가 임대 문의'가 붙은 빈 점포에선 노년층 상인 네 명이 모여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70대 여성이 "탄핵 돼가 마이 서운하데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80대 여성은 "탄핵 안 돼서 윤석열이가 복귀했으면 경제에도 더 도움 됐지"라고 맞장구쳤다. 이들의 표심은 이번 대선도 변함이 없다. "우린 저번에도 당연히 윤석열 뽑았제. 차려진 후보가 아무리 신통치 않아도 우리는 국민의힘 찍는데이."
원단 장사만 47년째, 시장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한형여씨(73)는 윤 전 대통령 관련 얘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다. "좌파가 이 좋은 대한민국을 다 망쳐놨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심경을 묻자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여기 상인들은 울고불고 난리 났다"고 전했다.
50대에서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 의사를 보인 이들도 많았다. 김현규씨(54)는 "이재명이 대통령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이재명은 서민 복지에 힘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대구 토박이라는 최윤섭씨(56)는 "정치 성향이 다를 수 있지만, 대구는 너무 일방적"이라며 "정치권이 이런 민심을 이용한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협치를 주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서문시장에서 10년 넘게 신발 가게를 운영해 온 현주석씨는 "희망이 없으니 정치나 선거에도 관심 없다"면서 "정치인들이 오면 상인들도 '장사가 평소보다 더 안 된다'며 싫어해요"라고 전했다. 대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현씨가 정치권에 바라는 점은 딱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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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협치해서 서민 경제 살리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예요."
대구=장보경 기자 jb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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