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새로운 롤모델 제시할 것
인성, 가치관 교육 개발에 집중
대학 의무시수 선제적 폐지 적용
국립대 인건비 부담 체계 바꿔야
"대학 교육의 본질은 인성과 지성이다."
30년 공학 박사로 살아온 학자는 왜 인문학을 강조했을까. 지난 22일 최재원 부산대 총장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궁금했던 대목이다. 그의 고민은 대학의 존재 이유에 관한 물음과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교육은, 특히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부산대의 사회적 책무 그리고 위상과도 맞닿아 있다. "서울대가 아니라면 굳이 다른 지역 대학에 보낼 이유가 있나." 부산 시민에게 부산대는 그런 대학이었다. 서울 최상위권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 부산대는 그들의 자랑이었다. 부산대는 1946년 5월15일 지역민 헌금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국립대학이다. 부산시민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국립대는 많지만, 부산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대한민국 최초 종합국립대학이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산대는 지난 5월 최재원 총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를 넘어 외국의 주요 대학과 경쟁하려면 어떤 역량을 길러야 하는지 기틀을 다지고 있다. 앞으로 4년의 세월, 최 총장은 학내 구성원 그리고 부산대 동문과 머리를 맞대고 길을 찾아 나갈 계획이다. 출발은 경쾌하다. 공학 교수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모습에 많은 의미가 녹아 있다. 학내 다양한 이들의 견해를 충분히 수렴할 자세가 돼 있다는 신호다.
창조적 지성과 바른 인성을 겸비한 효원인. 부산대가 지향하는 인재상이다. 효원(曉原)은 우리말로 '새벽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정진하는 자세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부산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의대, 치대, 한의대, 약학대, 법학전문대학원을 모두 갖춘 대학이다. 최 총장은 부산대를 대학의 새로운 롤모델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을 쏟을 계획이다. 부산대 졸업생은 이런 냄새가 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역시 부산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국립대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다.
다음은 총장과의 일문일답 전문.
-취임한 지 두 달이 됐다. 그동안 느낀 바가 있다면.
▲지역에서 오랫동안 부산대 교수로 지내다가 대학 총장을 맡고 보니, 사람들이 거는 기대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부산대가 국립대로서 우리나라 고등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감이 있어야 하고, 비전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 하루하루 마음이 많이 무겁다. 2개월 동안 지역사회 주요 기관과 언론사, 중앙 정부와 국회 등을 찾아가며 바쁘게 보냈다. 7월에는 학내 조직 개편을 통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혁을 시도했다.
-취임사에서 거점 국립대 롤모델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롤모델을 구상하고 있나.
▲대학이 하는 일은 교육 연구가 핵심이다. 학생들에게 교육에 대한 기준을 재정립해주고 싶다. 부산대가 국립대학 리더로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만의 탁월성과 대표성을 보여줄 대표 선수가 필요하다. 'K팝', 'K푸드'처럼 부산대만의 분야를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
부산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고, 물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서 우리만의 분야를 갈고 닦아야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분야는 다양하게 길러내려고 한다. 국립대는 다른 과학기술원처럼 '무남독녀 외동딸'로 키우는 것보단, 대가족 모두를 행복하게 살려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이공계든 인문계든 다 안고 가야 하는 소명이 있다.
특히 인성과 가치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인프라와 인력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특정 전공에 수요가 몰리면서 그렇지 않은 대학과 전공이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가적으로 너무 큰 손실이고, 개인의 삶을 보더라도 참 불행한 일이다. 이런 획일적인 기준보다는, 학생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본다.
-공학 전문가로서 인문학적 마인드를 강조하게 된 계기가 있나.
▲40대를 넘고 아이를 길러보니 이타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절실히 체감하게 됐다. 각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학생들이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성공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이뤘으면 하는 마음이 클 것이다. 인생을 먼저 살아온 선배이자 부모의 입장에서 내 자식들이 엉뚱하게 가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인도할 수는 없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는데 그 토대 위에 계속해서 쌓아 올린다면 사회에는 오히려 악을 끼치는 것이다.
-공학 전문가 출신의 총장이 인문학을 강조하면 교내에도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문학 교수들에게 물었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문학이 활짝 꽃핀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공학 연구는 삶을 윤택하게 하거나 제품의 원가를 떨어뜨리는 등의 기여를 하는 반면, 인문학은 소설이나 대중 강연 등 콘텐츠로 세상에 울림을 주고 삶의 깊은 교훈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앞으로는 모든 대학의 교수 업적 평가도 획일적인 성과 중심의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 단순히 논문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과 저서도 성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혁신을 구상하고 있나.
▲대학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걸림돌이 '교원의 시수 문제'다. 정부가 전임교원의 주당 9시간 이상 의무시수를 폐지했지만, 각 대학은 실질적으로 폐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교수 업적 평가나 수당 제도 기준이 9시간 이상 시수에 맞춰져 있다. 우리 대학이 선제적으로 한번 적용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대학은 기초 연구 중심으로 변해갈 것이다. 국립대의 경우도 학부 교육은 온라인이 많이 대체하고, 대학원 교육 중심으로 흘러갈 것 같다. 하지만 대학의 모든 제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 대학 차원에서 바꿔야 할 관행과 제도, 정부 차원에서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나눠서 따져보려고 한다.
-부산대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표도 갖고 있나.
▲QS, THE 등 영향력 있는 세계대학평가에서 부산대 순위가 세계 500위권으로 크게 상승했다. 특히 국립대로는 유일하게 QS와 THE 아시아대학평가 결과 내 100위권 내에 진입하는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세계 3대 평가 지표로 알려진 평가의 한계도 존재한다. 정량화가 어려운 교육 역량을 반영하고 있지 않고, 연구 역량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QS나 THE의 경우 전부 서양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시아권 국가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좋은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50% 정도는 등수를 높이는 데 집중을 하고, 50%는 진짜 우리의 실력을 높이는 데 에너지를 쏟자는 생각이다. 목표는 세계대학평가 300위권 정도로 잡되, 진짜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대학들의 공통된 고민은 오랫동안 지속된 등록금 동결이다. 부산대도 재정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나.
▲정말 큰 문제다. 국립대는 정부 지원이 있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아사 상태에 가깝다. 공공요금과 물가, 인건비가 오르고 있는데 정부 지원은 계속 줄고 있다.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회계(고특회계)에 대한 기간 연장이 필요하다. 게다가 국립대는 공무원과 강사 인건비를 정부가 아닌 학교에서 지급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부산대 공무원 인건비가 약 1235억원인데 이 중 67.7%는 정부 지원 예산이고, 나머지 32.3%인 158억원은 학교 자체 비용으로 마련됐다. 이 부담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국립대 자체에서 부담하는 공무원 인건비 부담 체계를 바꿔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도 대학이 처한 위기 요소 중 하나다. 대안이 있나.
▲부산시 인구가 현재 320만명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근본 원인은 정주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대를 졸업했는데 부산에 거주하려면 번듯한 직장을 얻고 결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산에는 큰 제조업 기업이 없다. 고급 일자리가 없어 인력이 빠져나갈 일만 많은 것이다. 숲을 가꾸지 않으면 새가 날아들 리가 있겠나. 부산에도 정주 여건을 마련하고, 부산대도 부산대만의 '명품성'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학생들이 지역을 보고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명성과 분야를 보고 진학할 학교를 정한다. 왜 우리나라만 들어오면 지역을 보고 학교를 정하나? 이는 대학들이 특징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떤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나.
▲대학 교육의 본질을 회복시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는 곧 개별 학생들 각자가 고유한 자신의 재능을 알게 하고,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이를 개발하고 발휘해서 전공이 되고 직업이 되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산대 졸업생들은 이런 냄새가 난다', '이런 분야는 부산대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국립대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기억이 되면 좋겠다.
대담= 류정민 사회부장
정리= 박준이 기자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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