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전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인터뷰
"정치의 기능 회복, 다원주의의 복원" 강조
"혐오와 야유가 정체성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공동체성, 연대, 공감 같은 가치들은 자라날 수 없다. 집단을 호명하는 언어가 이처럼 분열적이면, 달리 말해 혐오가 서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하면, 남는 것은 전염성이 큰 적대와 증오, 폭력이라는 사회적 질병이다."
‘혐오하는 민주주의’의 저자 박상훈 전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팬덤 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팬덤 정치는 중산층 대졸자 등이 거대 정당의 특정 개인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한국적인 특성을 보인다. 기성정치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정당 내부에 대해서도 강한 혐오를 가지며, 선과 악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탓에 정치 공동체 내 공존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직접민주주의라는 가치 아래 팬덤 정치가 정치의 주요 동력을 넘어 정치의 중심을 넘보는 현재의 양상에 대해 박 전 연구원은 강한 우려를 밝혀왔다.
팬덤 정치의 극복 방법으로 그는 다원주의 복원을 꼽았다.
팬덤 정치가 정치권에서 공공연한 화두로 다뤄지고 있다. 수박 논란이나, 전당대회 폭력 등 우리 사회의 혐오 정치가 확산일로다. 이 혐오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인간 본성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인간 본성에 여러 요소가 있는데 정치가 좋을 때는 혐오보다는 다른 좋은 본성이 나타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게 혐오다. 사람들이 뒷말할 때 나쁜 말을 하기 쉬운 것처럼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것을 정치가 악용하면 혐오가 커지고, 정치가 좋다면 혐오가 줄어든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팬덤 정치와 관련해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론을 얘기했다. 왜인가?
변화라는 게 어떤 한 요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접합돼 있다. (팬덤 정치에 대한) 책임론을 말하려면 원인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 때로 봐야 한다. 행정수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여당의 공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권력분립이나 삼권분립에 안 맞는다. 이전 대통령들의 경우,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의회나 정당을 지배하려는 것에 대해 절제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을 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하려는 것을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써서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런 논리 등이 동원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원 참여 확대 등 당원 주권론이 민주당 등에서 힘을 받고 있다.
권력자가 직접 민주주의를 동원하는 운동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의회 정치나 정당 정치를 파괴하는 일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행정력을 행사하고 돈을 쓰려면 의회의 입법이나 예산 심사를 거쳐야 한다. 국민을 직접 동원하는 것은 이런 의회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정당을 해산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제대로 된 게 없다. 최고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최고 헛된 약속을 하게 됐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분노를 표출했는데, 그 결과 대통령은 자애로운 군주처럼 혜택을 누렸을지 몰라도. 정치는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다. 지금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의회나 정당, 시민사회, 언론 등 다원주의에서 강조됐던 견제와 균형을 벗어던지고 싶은 욕구와 관련돼 있다. 책임 정치를 규범으로 삼아야지. 나는 국민에게 직접 듣겠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밖에 남지 않는다.
왜 직접민주주의 확대론에 대해서 비판적인가.
직접민주주의를 한다고 해도 대통령은 한 명을 뽑아야 한다. 국회의원을 4000만명으로 늘릴 수는 없다. 법을 만들고 정부를 운영하는,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은 시민 집단 가운데 선발된 소수다. 통치는 그런 면에서 소수가 하는 것이다. 소수가 맡게 되는 문제를 다수가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 관념 자체가 일단 허상이다. 허상을 동원하게 되면 실제는 시민들의 의사를 평등하게 표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승자가 된다. 그 소수는 대개 직접 민주주의나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본인이 권력을 갖고자 하는 야심가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정치 문제를 시민이 직접 하느냐, 당원이 직접 하느냐 등의 허상을 갖고 말하는 것은 결국 야심가들의 정치 논리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고의 직접민주주의다. 이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인류 역사에서 본 적이 없다. 소수만 참여했던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와 비교해 우리 인류는 엄청나게 많은 희생과 진보를 이뤘다. 현대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우리가 하는 민주주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거기서 조금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혐오를 앞세운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유력 정치인이 되고 있다.
좋은 일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이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잘못됐는데도 용기를 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언론도 문제라고 봐야 한다.
정치지도자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 팬덤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정치 영역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개성적 역할이 크게 작용한다. 그것을 리더십이라고 부른다. 사법부나 행정부의 경우 개개인의 개성이 많이 작용하면 관료제나 사법의 기능에 위배되겠지만 정치는 정치인의 페르소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이재명 대표는 본인이 그 방법(강성 지지층을 결집)으로 권력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현재의 지지층을 불러들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의 팬덤은 어떻게 평가하나.
넓게 보면 운동권 청산을 앞세우거나 이재명 전 대표의 문제를 말하는 것 등을 보면 팬덤 정치의 유형이다. 위드후니에서 드러난 팬덤이 ‘수박을 깨자’ 등을 말하는 개딸에 비해 덜해 보이지만 메커니즘과 특성은 유사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팬덤 정치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기성 언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레기’보다 더 큰 위험성을 가진 이들을 언론의 힘을 능가하는 돈과 법과 추종의 힘을 다 가진 권력을 만들도록 한 것은 민주당과 진보 진영의 잘못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책임을 부과하는 게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다. 그런데 권력은 실제 행사하는데 그를 견제할 방법은 없다. 자기 방송에 유력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전문가들, 예술가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군주다. 군주인데 책임을 묻지 않는 지하 정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론조사를 하고 공천에 관여하고, 정치인에게 절까지 시키는데도 정치인들이 못 나와서 안달인 것도 큰 문제다. 이렇게 힘만 있고 이익이 되면 그게 곧 선인 것처럼 돼버려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돈과 정치권력을 다 누리는 데 더해 추앙까지 받으니, 넓게 보면 유사 신정정치를 몇몇 사람이 하고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한다면 팬덤 정치의 문제도 극복할 수 있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한 적법하게 주권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야 한다고 계속 말할 수밖에 없다. 계속 야유하고 밖에서 정치를 조롱하고 반정치에 그냥 편승해서 본인들은 마치 깨끗한 것처럼 구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를 다 위선으로 이끌게 된다. 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변화가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주장하는 데 용기를 잃지 말기를 바라야 한다. 언론도, 방송도, 지식인들도, 종교까지 갈라져 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질서 있는 변화가 가장 좋은 길이다.
선거제도나 개헌 등을 통한 정치 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제도가 정해지면 사회가 그 제도에 따라 싹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 권위주의적 제도론이라고 부른다. 국회의장이 되면 관성적으로 개헌을 얘기하고 정치인들이 오면 맨날 제도 개혁을 마치 정치개혁의 본령인 것처럼 말하는데 저는 믿지 않는다. 왜 우리가 다원주의적인 정치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합의가 커져야 하고 그런 게 없이는 무슨 제도를 갖다 놔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수단만 찾게 된다. 정치는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만든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제도를 통해 공익에 가까운 것을 하려고 만든 것이다. 공익에 가깝게 하려다 보니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해관계나 열정이 다른 것을 존중해 만들게 됐다. 선호가 다원적임을 인정하고 그 다원적 선호 구조에 맞게 정치적 표출 구조를 갖는 게 민주주의다. 선호의 다원성을 억압하고 같은 당내에서도 생각이 다르면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 증오, 질투를 드러내는 게 팬덤이다. 대안은 팬덤이 나쁘다는 점을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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