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도박은 크게 실패했다.(이코노미스트)"
"유권자들이 마크롱 대통령을 처벌하고 극우를 격려하고 있다.(워싱턴포스트)"
유럽의회 선거에 이어 프랑스 조기총선 1차 투표에서도 극우정당이 승기를 잡으면서 마크롱 대통령은 한층 수세에 몰리게 됐다. 깜짝 조기총선 카드를 통해 자칫 극우정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부각시킴으로써 판을 뒤집고자 했던 마크롱 대통령의 도박이 결국 '악수'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1차 투표 출구조사에서 득표율 1위를 기록한 극우 국민연합(RN)은 이 기세를 몰아 2차 (결선) 투표에서 과반의석을 확보, 사상 첫 총리까지 배출한다는 목표다.
"이변 없었다"...1차 투표 출구조사서 극우당 1위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실시된 조기총선 1차 투표 출구조사들을 종합한 결과, 극우정당 RN은 33~34%대 득표율을 기록해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28~29%대),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여당 르네상스측 앙상블(21~22%대)을 훨씬 앞설 것으로 예상됐다.
현 출구조사 대로라면 RN이 의회 과반을 넘어설 가능성도 존재한다. ELABE은 BFM TV 출구조사 결과를 인용해 RN이 255∼295석을 차지할 것으로 추산했다. NFP는 120~140석, 앙상블은 90~125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됐다. 프랑스 하원 의석은 577석으로 과반 확보를 위해서는 289석 이상이 필요하다. 다만 입소스의 의석수 분석에서는 RN이 230~280석으로 과반에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됐다.
현지에서는 "이변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까지 공개된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직전 여론조사와 비교할 때 RN은 1~2%포인트 낮고, NFP와 앙상블은 비슷한 수준이다. 시장에서도 극우 집권 우려가 이미 프랑스-독일 국채 금리 스프레드 등으로 상당 부분 선 반영되면서 현재 큰 움직임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 삭소방크 프랑스의 안드레아 투에니 책임자는 "놀라운 결과가 아니기에, 시장이 급락할 이유도 없다"고 전했다.
특히 67%에 달하는 높은 1차 투표율(잠정치)은 이번 조기총선을 둘러싼 관심이 그만큼 높았음을 시사한다. 이는 2022년 총선 당시 1차 투표율의 47.5%보다 19.5%포인트 높다. 갑작스러운 조기총선 발표, 마크롱 행정부에 대한 누적된 불만, 사상 첫 극우 다수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뒤섞이면서 높은 투표율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RN의 실질적 지도자인 마린 르펜 의원은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기자회견에서 "프랑스 국민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투표"라고 환영했다. 그는 "아직 승리는 아니다"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RN 대표인) 조르당 바르델라를 총리로 임명할 수 있도록 (2차 투표에서) 절대 다수로 만들어달라"고 촉구했다.
마크롱 도박, 악수였나...'동거정부' 또는 '헝의회' 가능성
극우정당 RN이 의회 권력에 한 발 다가선 반면, 집권 여당인 르네상스 중심의 연합 앙상블은 의석수가 반토막날 위기에 처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투표 결과는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연합 앙상블에게는 참담한 굴욕"이라며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조기총선) 결정은 그의 동맹들조차 경악하게 했다. 역효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한 의원은 현재 250석 규모인 앙상블 연합이 최대 120석 수준에 그칠 것이란 전망에 대해 "완전한 재앙"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파리발 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2차 투표에서 민주적·공화적 결집을 촉구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면서도 "이날 출구조사 결과는 그의 도박이 엄청난 역효과를 냈고 그의 정치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됐음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당초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총선 발표는 극우정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부각시켜 유럽의회 선거에서 확인된 RN의 기세를 꺾겠다는 의도였으나, 오히려 극우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됐다는 진단이다. 정치분석가 클로이 모랭은 "마크롱 대통령이 일부 국민들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분노를 과소평가했을수 있다"고 진단했다.
만약 RN이 최종적으로 의석 과반을 확보할 경우 프랑스에서는 1972년 극우 정당 탄생 이후 처음으로 극우 총리가 나오게 된다. 그간 바르델라 대표는 단독 과반을 확보했을 때만 총리를 맡겠다고 밝혀왔다. 이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가 소속 정당이 다른, 이른바 ‘동거(cohabitation) 정부’도 사상 네번째 출범하게 될 전망이다. 그간 마크롱 대통령은 총선에서 지더라도 2027년 선거까지 대통령직 사임은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동거정부가 들어설 경우 정치적 입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간 추진돼온 마크롱표 개혁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 친유럽·친기업 의제 역시 RN이 주장하는 유럽회의론·반이민·포퓰리즘 정책으로 대체될 수 있다.
RN이 단독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될 가능성도 크다. 이 또한 결국 프랑스 정치의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CNN방송은 "RN이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이나 과반인 289석에는 미치지 못할 수 있다"면서 "이는 프랑스가 의회 내 교착, 더 큰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전했다. 정치컨설팅회사 유라시아그룹의 무즈타바 라흐만은 "화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의회 교착과 혼란을 겪을 것"이라며 "이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우크라이나에 나쁜 소식"이라고 분석했다.
헝 의회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연립 정부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힘을 받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자리를 잃게 된 중도파 의원 등 기존 지지 세력이 마크롱 대통령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미국 주재 프랑스 대사 출신인 제라드 아로드는 "프랑스의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아직 안끝났다" 2차 투표서 RN 막기 움직임...곳곳서 시위도
각 정당은 1차 투표가 끝나자마자 2차 투표에서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나선 상태다. 1차 득표율 1위를 기록한 RN의 르펜 의원은 안정적인 정부 운영을 위해서는 과반 확보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반이민 정책을 우려하는 유권자들을 의식한 듯 "어느 프랑스 국민도 권리를 잃지 않을 것", "상황이 허락하는 한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새 권리를 만들 것"이라고도 말했다.
반면 좌파연합과 중도파에서는 극우 정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이들은 RN에 맞설 최선의 선택은 자신이라며 3자 대결이 벌어지는 지역구에서 후보 단일화를 위한 3위 정당 사퇴 등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출구조사 공개 직후 성명을 통해 "2차 투표에서 RN에 맞서 광범위하고 분명한 민주적·공화적 결집이 필요한 때"라고 호소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 역시기자회견에서 "2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이 당선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며 "단 한 표도 RN에 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탈 총리는 당초 다음날 실업급여에 새 한도를 도입하는 법령에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선거에서 확인된 여론을 의식해 이 또한 중단하기로 했다.
좌파연합 NFP에 속한 장뤼크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는 "이번 선거는 마크롱 대통령의 명확한 패배"라면서 NFP가 최선의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NFP 진영에 속한 4개 당은 2위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기 위해 3위 후보의 사퇴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NFP 진영에서 출마한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2차 투표에서 뭉치지 않으면 (극우 집권)리스크가 현실이 될 것"이라며 "모든 이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직 개표가 진행중인 가운데 이날 1차 투표에서 선출된 의원은 80명 이상으로 확인된다. 나머지 지역구에서는 7월7일 2차 투표가 치러진다. 2차 투표는 1차 투표에서 등록 유권자 수의 12.5% 이상을 득표한 후보자들 또는 상위 득표자 2명이 맞붙게 되며, 최다 득표자가 당선된다. 이에 따라 각 정당은 48시간 내 2차 투표 후보 명단을 확정해야 한다. 주요 외신들은 극우 RN의 집권을 막기 위해 이제 좌파연합과 중도연합 간 치열한 단일화 교섭이 있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 등에서는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극우 세력의 집권에 반발하는 시위도 벌어지고 있다.
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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