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진 미국 스탠퍼드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인 최초 스탠퍼드대 종신(tenure) 교수라는 수식어로 유명하다. 1981년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뉴욕 로체스터대로 유학을 가 1987년 스탠퍼드대 조교수로 임용됐다. 종신 교수 지위를 획득한 때는 1995년. 황 교수는 2022년 은퇴했으며 현재 스탠퍼드경영대학원 잭디프 로시니 싱(Jagdeep and Roshini Singh) 석좌 명예교수로서 스탠퍼드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 그는 35년여 스탠퍼드에서 얻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경영이라는 세계'라는 첫 책을 출간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의 한 카페에서 황승진 교수를 만났다.
- 늦은 나이에 유학을 결심하셨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1980년 신군부의 과외금지 조치다. 1970년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아버지가 집을 담보로 활어 사업을 했는데 콜레라가 발생했다. 일본 수출 길이 막히고 활어가 모두 폐사했다. 집이 차압당해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집달관들이 와서 가재도구들을 모두 밖으로 내놓았다. 어머니는 평생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분이고 내가 장남이고 동생만 넷이었다. 대학교 1학년인 내가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과외 선생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돈 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과외와 학원 강사 생활을 계속 했다. 그런데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과외 금지 조치를 내렸다. 과외가 금지된 뒤에는 신탁은행 전산부에 들어가 일을 했다. 그때 이미 대리, 과장이 된 친구들도 있었고 유학 갔다가 돌아와 박사 학위를 딴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이제 직장 생활 시작했는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는 전공이 섬유학과였는데 1981년 뉴욕 로체스터 대학에서는 통계학과를 전공으로 택했다.
▲섬유학과 전공에 애착이 없었다. 섬유학과 수업 중 좋아했던 과정이 품질 관리였는데 거기에 통계학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통계학과를 선택했다. 서울대에서 전공에 흥미도 없고 과외 하느라 바빠서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 C+ 정도였다. 유학을 가기가 어려운 성적이었는데 운이 좋게 로체스터대에서 뽑으려던 학생이 다른 학교를 선택해 결원이 생겼다. 그래서 학점은 안 좋았지만 대학입학자격시험(SAT)과 대학원수학자격시험(GRE) 성적이 좋았던 내가 대신 뽑혔다. 로체스터대에서는 전 과목에서 A를 받았다. 서울대에서 겨우 C+ 학점 받은 학생이 로체스터에서 모두 A를 받으니까 도대체 서울대가 어떤 학교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박사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가 내가 보기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그 사람 밑에서 공부하면서 쓴 박사 논문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고 스탠퍼드대에서 조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애초 유학을 마친 뒤 돌아와서 국내에서 대학 교수가 되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그렇게 늦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스탠포드대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관둘 수가 있나. 결국 눌러앉았다.
- 스탠퍼드에서 강의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제자는 누가 있었나?
▲오미드라는 이란인 학생이 기억에 남는다. 중학생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학생이었다. 수업 때마다 항상 맨 앞에 앉아 열심히 듣던 학생이었다. 10년쯤 지나서 우연히 쇼핑몰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내냐고 했더니 스타트업을 하다가 매각하고 새 회사에 들어가 임시 사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미드가 새 회사 이름을 알려줬는데 회사명이 특이하다 생각하고 헤어졌다. 다시 5년 쯤 후에 제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오미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이름 특이하다고 생각한 회사가 구글이었다. 구글이 상장하면서 억만장자(billionaire)가 네 명 탄생했는데 공동 창업주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 최고경영자(CEO),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오미드였다. 오미드 코데스타니. 스티브 잡스의 아내 로런 잡스도 내 수업을 들었다. 로런 잡스가 1학년 때 내 수업을 들었고 2학년 때 스티브 잡스를 만나 결혼했다. 성적은 평범했는데 성격이 활달했다.
- 스탠퍼드는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창업을 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책에는 교수님도 한국계 미국인 제자 3명에게 벤처캐피털 창업을 권한 것으로 나온다.
▲벤처 투자가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이면서 약간의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벤처 투자를 할 수 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에게 벤처 투자를 하면 어떻겠냐고 설득을 했다. 현 회장이 스탠포드 출신이다. 현 회장이 자금을 투자할테니까 벤처캐피털을 운용할 사람을 구해보라고 했다. 한 킴과 브랜든 킴이라고 하는 제자 두 명이 생각났다. 믿고 아끼는 제자들인데 둘이 항상 같이 붙어다녔다. 한 킴에게 연락을 했는데 한 킴이 나는 컨설팅을 하겠다고 벤처 투자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해서 벤처투자 어렵지 않다고 내가 도와줄테니까 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한 킴과 브랜든 킴이 벤처투자 경험이 있는 호 남이라는 친구까지 데려와서 벤처캐피털 알토스 벤처스를 시작했다.
- 알토스 벤처스가 쿠팡과 배달의민족에 투자할 때 자문을 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쿠팡은 내가 이렇다 할 조언을 준 것 같지는 않다. 배달의민족 투자 때는 내가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김봉진 대표가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사업을 할 수 있는 모든 자질을 갖춘 사람이 생각이 들었다. 투자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알토스에서 결정을 한 것이다.
- 스탠포드에서 근무를 하시면서 정보기술(IT) 업계의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을텐데 정작 책에서는 평생 재계와 학계에서 만난 사람 중 천재라고 할 만한 인물은 서너 명 정도 밖에 없다고 하셨다.
▲천재라고 하면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 멀리 넓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클라이너 퍼킨스'의 전설적인 투자가인 존 도어(스탠퍼드 출신은 아니지만 실리콘밸리 기업 투자로 클라이너 퍼킨스를 업계 최고 벤처캐피털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2022년 스탠퍼드에 역대 최대 규모인 11억달러(약 1조5237억원)를 기부해 화제를 모았다)가 스탠퍼드에 왔을 때 한 학생이 가장 훌륭한 리더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그 때 존 도어가 구글의 레리 페이지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를 꼽았다. 내가 보기에 래리 페이지와 제프 베조스는 멀리 넓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구글과 아마존 모두 A에서 시작해 B, C, D로 사업을 계속 확장해간 형태인데, 페이지와 베조스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잘 수용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즈니스 리더로서 천재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종류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도 결코 천재적 엔지니어, 모범적 리더도, 기록에 남을 만한 전략가도 아니었다고 썼다.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하루는 잡스가 종일 손만 보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잡스는 어떻게 이 손에 딱 어울리는 익사이팅한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느냐, 이것만 고민한 것이 아닐까. 잡스는 결국 열정 하나로 모든게 설명되는 사람이다.
- 결국 기업의 리더가 반드시 뛰어난 역량을 갖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책에서 리더는 운전자로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에 맞춰 조언자, 비평가, 방관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리더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총괄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 이것 해 봐라, 저것 해 보라며 마이크로 매니징을 한다. 이렇게 했을 때에는 결코 좋은 혁신이 나오지 않는다. 혁신은 코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에지에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일하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혁신의 기회를 볼 수 있다. 리더가 코어에서 해야 할 일은 에지에 기회를 많이 주고 그 결과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혁신 개발은 에지에서 하고 혁신 관리는 코어에서 해야 한다.
- 리더가 때로 방관자 역할도 해야 된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사회 변화가 빨라지고 그에 따른 불확실성도 높아져 때로 신중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경제학자들이 미래 예측에 미숙하다'고 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경제학이든 경영학이든 미래 예측은 학자들의 영역이 아니다. 학자들은 예측을 못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은 남들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학자들을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 실제 경제 예측은 피델리티나 뱅가드 등 주식 투자자들의 영역인데 이들도 스탠더드앤푸어스(S&P)500 지수 평균 수익률을 넘지 못한다. 정부가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기대도 허황된 것이다. 예측도 통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장에 맡겨야 한다. 다만 정부는 시장이 왜곡되지 않도록 보조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 불확실성이 점점 더 커진다면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채찍 효과'도 점점 더 커진다고 봐야 하나?
▲불확실성이 커지면 채찍 효과도 더 커진다고 봐야 한다. 채찍효과라는 것이 어떤 판매의 결과를 근거로 수요 예측을 했을 때 그 오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당연히 공급망 전체의 예측이 들쭉날쭉일 수 밖에 없다.
* 채찍 효과는 황승진 교수가 1997년 동료 교수 2명과 함께 발표한 논문 '채찍효과(Bullwhip effect), 공급망(Supply Chain)에서의 정보 왜곡'에 언급한 개념이다. 소비자의 수요는 작은 변화를 보이는데도 소매점, 도매점, 생산자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수요 변동폭이 증폭되며 이 같은 수요 정보의 왜곡현상으로 재고 증가, 서비스수준 저하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책을 읽으시는 것 같다. 특히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 서미싯 몸 등 유명 작가들의 소설에 빗대 다양한 경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운 점이 인상적이다. 문학이 경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영문학을 좋아해 많은 소설을 읽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영어 원문 소설도 많이 읽었다. 책에는 모두 읽은 작품들을 인용해 썼다. 문학이 경영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인상적으로 읽어서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꼽는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의 '총, 균, 쇠'가 정말 명작이다. 역사학자나 경제학자들의 비판도 있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힘이 엄청나다. 문학 작품으로는 찰스 디킨스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좋아한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가장 좋아한다. 마르케스의 글에서는 상당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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