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컴퓨터 시뮬레이션, 핵실험 대체해
슈퍼컴퓨터 발전으로 '알고리즘 경쟁'화
핵 열강들, 더 강한 핵탄두 개발 쉬워져
핵무기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단연 핵실험입니다. 핵분열 이론에만 의존해 만든 핵폭탄이 실제 의도대로 작동하는지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당연합니다. 지금껏 전 세계 핵 열강들은 2100번 넘는 핵실험을 했습니다. 심지어 북한은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지하 핵실험'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핵실험과 원자력 무기 경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아들였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핵 강국들은 핵실험 대신 순수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냉전부터 시작된 핵 경쟁이 알고리즘 경쟁으로 전환하는 순간입니다.
세계 최초 핵실험 없이 완성된 핵탄두
핵무기는 핵분열, 혹은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입니다. 그 원리는 수십년 전부터 익히 알려졌지만, 미국·영국·프랑스 등 주요 핵 열강은 핵분열·융합의 효율성을 증대해 더욱 강력하면서도 안전한 탄두를 만드는데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왔지요.
오늘날 핵무기는 최첨단 과학 시설에서 연구됩니다. 우선 강력한 레이저를 핵물질에 쏴 핵폭발을 재현하고, 그 순간을 초정밀 방사선 카메라로 촬영합니다.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슈퍼컴퓨터로 옮겨 '가상 핵실험'을 진행하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최근 컴퓨터 기술이 급격히 진보하면서, 가상 핵실험이 실제 핵실험을 대체하는 순간이 임박했습니다.
최근 영국 정부는 핵무기 및 원자력 산업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핵무기, 원자력 잠수함, 소형 원자로 개발 등을 총망라한 해당 보고서엔 차세대 핵무기 연구 개발 계획도 포함됐습니다. 영국 정부는 세계 최초로 순수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개발한 핵무기, A27 '아스트라이아'를 제조할 방침이라면서 "핵실험 없이 생산되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가 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슈퍼컴퓨터 발전, 핵실험을 가상 영역으로 옮겨
차세대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영국 원자력 무기 개발 부서가 도입한 최신 슈퍼컴퓨터 '발리언트(Valiant)'입니다. 상세한 제원이나 연산 능력은 기밀로 붙여졌지만, 국가 최고 슈퍼컴퓨터 등급의 연산 능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리언트는 아스트라이아 핵탄두의 폭발 순간을 디지털 세계에 완벽하게 재현해 낼 예정입니다.
핵실험 없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건 영국뿐만이 아닙니다. 오는 2030년대에 차세대 핵탄두를 도입할 예정인 미 국방부도 과거 "미래에는 시뮬레이션만으로도 핵탄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 미국 핵무기 연구를 담당하는 로스 앨라모스 리버모어 연구소는 이미 2022년 핵폭발을 100% 구현하는 3D 공간 가상 시뮬레이션을 완료했습니다.
'알고리즘 경쟁' 전환된 핵무장 경쟁
아이러니하게도, 가상 핵실험은 기존 핵 열강과 신규 핵무기 보유국 사이의 격차를 더 벌리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가상 핵실험의 장점은 예산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다는 겁니다. 덕분에 핵 과학자들은 더욱 높은 에너지 효율성을 갖춘 모델을 찾게 되겠지요.
반면 최첨단 레이저 시설과 카메라, 컴퓨터를 갖추지 못한 나라들은 여전히 현실 핵실험에 의존해야 합니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차례 지하에서 핵폭탄을 터뜨려 온 북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미 유엔(UN)은 1996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했으며, 누구든 현실 핵실험을 강행한 나라는 국제 사회의 엄격한 경제 제재를 받게 됩니다.
갈수록 더 강해지는 핵무기
핵무기 개발 경쟁이 '알고리즘 경쟁'으로 전환하면서, 핵무기의 화력은 더 강해질 겁니다. 사실 지금까지 핵탄두는 계속해서 강화돼 왔습니다. 미군이 1945년 구 일본제국에 투하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의 핵출력(Nuclear weapon yield)은 '고작' 16킬로톤(kt·1kt당 티엔티 화약 1000t)의 폭발력을 보유했습니다.
오늘날 미 해군 영국·왕립 해군이 사용하는 핵탄두의 최대 출력은 450kt이 넘습니다. 게다가 이런 핵탄두를 핵미사일 하나에 최대 14발씩 적재하지요. 기술력이 훨씬 떨어지는 북한이 실험한 핵탄두조차 지진파 계측 결과 약 140kt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영국 등이 오는 2030년대부터 도입할 새 핵탄두의 출력은 기밀이지만, 최소 지금 사용하고 있는 탄두와 동급이거나 더 강할 겁니다. 시뮬레이션 덕분에 훨씬 높은 출력을 가진 핵탄두를 디자인하는 일은 더욱 쉬워졌습니다.
따라서 핵무장의 '알고리즘 경쟁'화는 인류에게 양날의 칼인 셈입니다. 이제 방사능 낙진으로 환경 오염을 초래할 우려는 줄어들었지만, 대신 인간은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더 강한 원자탄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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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순수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만들어진 핵탄두가 현실에서 정확히 의도한 대로 폭발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알게 되는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는 게 더 나은 미래일 겁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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