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여성 최초 미 스탠퍼드대 종신교수 이진형
남성 중심 조직 반발에도 꿋꿋이 버텨
경계 넘을 때마다 수많은 장벽 극복
사회에 긍정적 영향 주도록 고민
"女만의 감각·인사이트 장점으로 활용해야"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전도유망한 전자공학도였던 손녀의 삶이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문제 풀이를 좋아했던 그의 눈앞에 평생을 바쳐 해결할 문제가 떨어진 것이다.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된 뇌과학자 이진형(47) 교수의 이야기다. 이 교수는 십수년간 뇌가 작동하는 법을 연구했고 이를 활용해 병을 진단, 치료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직접 회사를 세워 사업가가 됐다.
이 교수는 목표를 위해 미국과 한국을 수시로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뇌 건강을 관리하는 세상'이 바로 이 교수가 목표로 하는 미래다. 목표를 위해 걷는 길은 순탄치 않다. 청소년기부터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꿋꿋이 버텨냈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학문의 경계도 스스럼없이 넘었다. 이후 닥쳐온 고난은 그를 더 강하게 했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지금껏 달려온 이 교수는 3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이 하나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 교수님의 목표 '뇌 건강을 관리하는 미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 지금의 뇌 질환은 심각하게 걸려서 모두 다 장애가 생긴다. 뇌 질환으로 장애가 생겨도 병원에 가서 진단하고 치료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일단 의사를 만나는 데 오래 걸린다. 환자가 많아 의사가 부족하다. 한 1년 기다려서 의사를 만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고 사진을 찍어도 정확히 어떤 질병인지 알기 어렵다. 경과를 보면서 진단해야 한다. 진단해도 치료 방법이 없다. 관리는 당연히 못하고, 심각한 질환이 생겨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그런 상황에서 진단, 치료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의 뇌 기능을 측정해 보면 어떨까 한다. 오늘 기억력이 떨어질 만한 기조를 보인다고 하면 거기에 맞게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식생활 조절, 운동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관리하다가 (본인의 뇌) 상태가 안 좋아져서 질병 단계로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병원 가서 정밀하게 진단받는 식이다.
- 그러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해온 일은 무엇이었나.
▲ 첫 단계로 15년간 한 연구의 핵심이 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뇌와 관련해 현재 진단과 치료를 못 하는 이유가 뇌의 기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라고 생각했다. 전자기기를 보면 어떻게 만드는지를 아니까 금방 고칠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뇌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아야 했다. 연구 과정에서 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게 된 게 많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환자들에 적용할 수 있는, 의료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 서울대 전기공학부 졸업했다. 일반적으로 전기공학부는 남초의 공간이다. 여성으로서 힘들진 않았나.
▲ 처음 남초 환경에 들어간 건 고등학교(서울과고) 입학했을 때였다. 그때가 전체 180명 중 30명이 여학생이었다. 한 반에 30명 중 5명이 여학생이었다. 대학교 때는 총원이 296명이었는데 그중 여학생이 7명이었다. 7명 중 현재 전기공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나 포함 2명뿐이다. 다른 사람은 다시 공부해서 의료계나 법조계로 떠났다. 기본적으로 남초 환경에서 여성이 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소수라서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다못해 미팅도 여대랑 한다. 입학할 때 입학 면접하는 교수님이 "너는 여학생이 뭐 하러 왔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 다른 여자 동기처럼 떠나지 않고 남았던 이유가 있나.
▲ 한번 시작한 걸 중간에 포기를 못 한다.(웃음) 학생들한테도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얘기한다. 목표한 바를 성취해내는 버릇을 들이라고 한다. 사실 목표한 것이 100이라고 한다면 보통 100을 다 성취하진 못한다. 그 중 10을 성취하더라도 성취하고 끝을 보는 버릇을 들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게 습관이다. 나의 경우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격인 것 같다. 어릴 때도 장난감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 놀곤 했고 탐구하는 걸 좋아했다. "불편한데 이거 어떻게 해야지" 하면서 문제 푸는 걸 좋아했다.
- 현재 직업이 교수이자 사업가다. 두 직업 모두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 역할인 듯싶다.
▲ 그래서 적성에 잘 맞다. 교수로서 하는 일은 디테일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일이다. 사업보다는 좀 더 좁혀서 깊게 들어가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엔 학계에서도 (상대적으로) 좁고 깊게 연구하는 것보다 문제를 풀기 위해 크게 퍼즐을 맞추는 걸 더 즐기는 편이다. 아카데믹한 연구를 하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즐겁다. 사업은 굉장히 종류가 많은 일을 맞추고 풀어야 한다. (사업은) 영역이 굉장히 넓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재밌다. 또 실제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 학교에서 하는 일은 문제를 풀고 논문을 쓰는 데까지다. 논문을 쓴다고 질병이 치료가 되지는 않다 보니 문제를 다 풀기 위해서는 두 개(연구와 사업)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한 고민을 실생활에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창업하게 된 것이다. 뇌 질환을 치료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연구를 하기 위해서 교수가 됐고, 그 연구를 목표한 대로 실생활에 만들려 하니까 사업을 해야 했다. 원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교수도, 창업가도 된 것이다. 두 직업 모두 풀고자 했던 문제에 맞춰서 골랐다.
- 듣다 보니 쉽지 않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 남들이 보기에 무모한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한 번도 무모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내 눈에는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근데 그 길을 가면서 보니까 내게 보이는 길이 남들에겐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남들에게도 길이 보이는 게 중요하기도 하다.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길을 어느 정도 가고 난 지금 돌아보면 그 격차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 길을 가면서 알았다. 그 격차를 좁히는 과정을 계속했다.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 그러한 과정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하고 있다. 또 다른 난관이 있을 듯한데.
▲ 지금까지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매 시기에 차별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은 든다. 인종 등의 면에서 말이다. 올라갈수록 '유리천장(조직 내 여성을 향한 차별)', '대나무천장(미국 내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으로 인한 어려움이 생각보다 많다. 당시엔 일에 집중해서 잘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끼리 서로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사회에 좀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 지금까지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경계와 장애물을 넘어온 듯하다.
▲ 일단 과학고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저 여자애가 거기 왜 들어가" 했다. 다음에 대학에서 전자공학부를 가니까 "여자애가 여기를 왜 왔니" 했다. 다 여자라서 생긴 반응이었다. 미국으로 가니까 외국에서 온 학생으로 바라봤다. 그다음에는 전자공학 박사를 하고 나서 뇌 과학으로 갔다. 거기서 "너는 뭐니? 족보도 없는 너"라고 해서 반발이 엄청났다. 이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학교에서 인정받을 무렵에 이제 사업을 하니까.(웃음) 경계를 넘어가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를 푸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경계를 넘었다. 처음 넘을 때만 해도 장애물이 그렇게 클 줄 몰랐다.
- 그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
▲ 가장 큰 위기는 차별받는 걸 몰랐던 것인 듯싶다.(웃음) 풀어야 하는 문제를 바라보고 달리는데, 차별받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 넘어져서 못 일어날 뻔한 적도 있다. 어떤 장애물은 (해결하기까지) 몇 년 걸리는 것도 있었다. 힘들었다.
- 그렇다면 직접 꼽은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 최종 목표한 걸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가 어렵지만, (현시점에서) 한마디로 얘기해야 한다면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벽을 넘으면서 버틴 것'이 아닐까. 매번 경계를 넘어오면 엄청난 핍박을 받았는데 각각의 벽을 넘어 인정받았다. 경계를 넘나들면서 계속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었던 것, 그것 자체가 가장 큰 성취가 아닐까 생각한다.
- 평소 스트레스 해소법은.
▲ 두 가지 방법으로 해소한다. 첫 번째는 영화를 많이 본다. 머리가 복잡할 때 다른 스토리로 머리를 채우면 (복잡한걸) 잊을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머리로 리셋 된다. 두 번째는 운동이다. 테니스를 제일 좋아한다. 요즘은 바빠서 잘 못 하긴 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을 땐 대회도 나갔다. 테니스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가 2개나 있다. 자전거도 종종 탄다.
- 죽기 전까지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인생 과제를 묻고자 한다. 지금까지 말한 뇌 건강을 관리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가. 꿈이 이뤄질 시점이 예상되나.
▲15년 정도 이 문제를 풀어왔는데 이제 답이 보인다. (꿈을 달성하는 시점은) 늘 내가 예상한 것보다 뒤로 갔다.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뇌 관련해서 상당 부분 진단하고 치료가 가능해지는 게 한 5년에서 10년 내에는 될 것 같다.
-여성 선후배들 그리고 동료 여성 사회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있다면.
▲ 남성이 가지지 못한 여성으로서 갖는 감각이나 인사이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장점으로 활용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모든 단점은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차별받는다는 피해의식을 갖는 건 좋지 않다. 어떻게 문제를 극복해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서로 돕는 문화가 중요하다.
이진형 교수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신경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2017년 한국 여성 최초로 스탠퍼드대 종신 교수가 된 그는 2019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인 'NIH 파이어니어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엘비스(LVIS)를 창업해 뇌 질환을 진단·치료하는 솔루션 개발, 적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