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노벨화학상 크리스퍼-카스9 유전자가위
의·생명 공학 혁신 일으켜…난치병·유전질환 치료 '혁명적 변화'
신이 주관하던 생로병사, 인간의 영역에 포함되나?
구글벤처스 거액 투자 등 전세계 생명공학 스타트업 붐 일으켜
표적이탈효과 등 정확성·효율성 극복 과제
면역반응, 윤리문제 등 걸림돌도 산적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인생을 다시 쓰는 도구다." 2020년 노벨위원회가 크리스퍼-카스9(CRISPR-Cas9) 유전자가위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들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면서 내놓은 평가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아직 한계는 많지만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최첨단 유전공학의 대표적 기술이다. 신이 주관하던 생로병사의 영역을 인간이 주도할 수 있는 도구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구글의 벤처캐피털(VC)인 구글벤처스가 거액을 투자하는 등 세계적인 투자 열풍이 일고 있는 이유다. 극복해야 할 과제와 윤리적 문제 등도 산적해 있다. 과연 크리스퍼 유전자가 인류에게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신의 손’이 되어줄까?
◇유전자가위란
생명체의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체(Genome)를 구성하는 DNA는 총 4개의 염기가 선형을 이루고 있다. 4개의 염기는 각각 아데닌(adenine), 구아닌(guanine), 사이토신(cytosine), 타이민(thymine)이다. 모든 생명체는 바로 이 4개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열돼 있냐에 따라 그 특성을 달리한다. 유전자가위는 바로 특정 염기를 넣거나 빼거나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2012년 개발된 3세대 기술,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대표적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세균이 바이러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 효소에서 착안한 기술이다. 세균은 바이러스와 상극인데, 최근에 공격해 온 바이러스의 정보를 저장해뒀다가(가이드 RNA) 다시 공격해 오면 바로 알아보고 달라붙어 분해 효소(카스9)를 분비해 DNA를 조각조각 잘라 무력화시킨다. 과학자들은 이런 세균의 대(對)바이러스 방어 효소를 활용하면 특정 유전자를 골라 공격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2012년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스페인 우메오대 박사와 제니퍼 다우드나 미국 UC 버클리대 교수가 화농성 연쇄상구균에서 발견해 처음으로 시험관 수준에서 작동 원리와 구성 요소를 밝혀냈다. 이들의 논문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2012년 6월)되자마자 과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인간의 마음대로 교정·개선해 과학과 의료기술의 미래를 앞당긴 혁신 기술이라고 평가받았다. 1세대(징크 핑거), 2세대(탈렌)에 비해 훨씬 값싸고 효율적이며 쉬운 방식으로 제작할 수 있다. 암을 비롯한 난치성 질환, 유전질병치료, 농축산물 품종 개량, 동식물 형질 개선 등 의·생명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두 과학자는 이 공로로 20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앞선 연구 결과도 있었다. 1987년 일본 과학자 요시즈미 이시노가 대장균에서 우연히 발견했었지만, 의미를 알지 못했다. 2000년대 초 스페인 과학자 모즈카도 이 특이한 염기 서열을 발견했고 크리스퍼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세균이 가진 일종의 후천적 면역 시스템일 것이라고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2011년 크리스퍼의 구성 요소 중 마지막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트레이서(tracer) RNA가 발견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샤르팡티에·다우드나 교수와 거의 동시에 비르기니우스 식스니스 리투아니아 빌니우스대 교수팀도 이런 기술을 개발했지만 3개월 늦어 노벨화학상을 놓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은 2013년 당시 김진수 서울대 화학부 교수 등에 의해 인간 유전자 편집에 성공하면서 그 유용성을 입증했다. 김 교수팀은 시험관 수준에서 작동했던 유전자가위에 인간 세포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아미노산을 추가하고 코돈(DNA에서 전사된 mRNA의 3 염기 조합) 서열을 바꿔 인간 유전자 편집에 성공했다.
◇ 업그레이드 연구 한창
최근에는 좀 더 효율성·정밀도를 높여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2016년 미국 하버드대·일본 고베대 연구팀은 타깃 DNA 이중나선 절단 없이도 높은 효율로 타깃 염기를 정확하게 치환할 수 있는 염기 교정 유전자가위를 개발했다. 즉 핀셋처럼 염기 하나만 콕 찍어서 바꾸는 교정 기술이다. 지난해 9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개발한 초소형 유전자가위도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절단 효소에 따라 카스9 외에 카스 12a(CAS 12a), 카스 14(CAS 14 또는 CAS 12f)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카스9의 경우 크기가 커 체내 전달이 어렵다. 카스 14는 크기가 작지만 효율이 낮다. 생명연은 교정 효율을 카스9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표적하지 않은 부위를 절단하는 오작동(off-target) 비율을 카스9의 절반 이하로 낮춘 크리스퍼-카스12f1 시스템을 개발했다.
조지 처치 하버드대 교수 연구팀이 2019년 개발한 ‘프라임 에디팅(prime editing)’ 기술도 주목받고 있다. 이 기술은 표적 유전자 손상 없이 새로운 유전자 염기서열을 그 안에 주입하거나 기존의 DNA 안에서 문제가 있는 염기서열을 제거할 수 있다. 연구팀은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이 우발적 오류 가능성·정교함 부족 등의 이유로 고밀도 세포 안에서의 치료에 실패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유전성 질환인 겸상적혈구빈혈증(sickle cell anemia), 테이삭스병(Tay-Sachs disease) 등 난치병 유발 돌연변이를 교정할 수 있었다. 최근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2나 로제타폴드 등 단백질 구조 예측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유전자가위 기술과 접목될 가능성에 생명공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유전자 편집이 그릴 ‘미래’
유전자가위 기술은 암을 비롯한 난치성 질환·유전 질병 치료, 농축산물 개량, 동식물 형질 변경 등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는 잘못된 유전자 또는 치료를 방해하는 정상 유전자를 제거하는 방식의 연구가 활발하다. 가까운 미래엔 잘못된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교정하는 치료법도 임상 연구에 돌입할 전망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는 2020년 2월 유전자가위로 면역 관문 유전자를 제거한 T-면역세포를 치료 불능 암 환자에 이식해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유전성 시력 질환 치료에도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한 민간연구팀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망막 유전질환 치료를 위해 유전자 정밀교정시스템을 개발, 임상 시험에 들어가기도 했다. 식물 품종 개량에도 쓰이고 있다. 중국과학아카데미는 2017년 유전자 편집을 이용해 병충해·제초제에 모두 강한 특성을 가진 작물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 10월 기초과학연구원(IBS)이 DNA를 사용하지 않고 단백질과 RNA로만 이뤄진 유전자가위로 식물 유전자교정을 세계 최초로 성공해 관심을 끌었다.
특히 농업 부문에서는 이미 유전자 편집을 통한 품종 개량이 상업화 단계다. 미국의 한 농업회사에선 지방산 조성이 다른 콩을 상용화한 제품이, 일본에선 감마-아미노뷰티르산(GABA)의 함량이 높아진 토마토를 만들어 판매 중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유전자가위 기술로 만들어진 작물을 유전자변형생물체(LMO)로 간주해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김상규 카이스트(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기존 방식으로 제작된 유전자조작(GM) 식물에 대한 논쟁의 출발점은 외래 유전자의 도입과 이 유전자로 인한 식물의 변화 혹은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라며 "유전자가위로 제작된 작물은 이런 문제를 다 해결했지만, 기존 GMO 관련 논의가 너무 쉽게 감정적인 논의로 흘러가 버린 적이 있어 별다른 희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계·과제도 산적
하지만 아직도 유전자가위 기술은 완성 단계가 아니다. 우선 유전자가위가 타깃 염기서열이 아닌 다른 염기서열에 작용해 원치 않은 돌연변이를 만들 수 있다. 이른바 표적이탈효과(off-target effect)가 발생한다. 최근 들어 원인 파악과 더 정밀한 유전자가위 기술이 개발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먼 상황이다. 체내 주입 시 면역 반응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 김 교수는 "핵심 과제는 유전자가위의 정확도를 높이는 일과 어떻게 이 유전자가위를 인체 내에 전달할 것인지다"며 "타깃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다만 모든 신약 개발에서 중요하며 특별히 유전자가위만의 문제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윤리·사회적인 문제도 있다. ‘맞춤형 아기 생산’이 대표적 사례다. 실제 중국에선 2018년 한 과학자가 유전자 편집을 통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일으키는 요소를 제거한 쌍둥이를 출산시켰다고 발표해 큰 파문이 일었다. 만약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기의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돈 많은 부모는 지능·체격·외모·건강 등 모든 것을 갖춘 아이를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운’에 의존하는 사회가 올 수 있다. 질병 치료도 비슷하다. 최근 화제가 됐던 10억원대에 달하는 희소 질환 치료제처럼 매우 비싸지만 ‘주사 한 방’에 자신의 유전자 결함을 치유해 무병장수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