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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사고와 잘 헤어졌어요…이젠 ‘재밌다’는 말 듣고 싶어” [서믿음의 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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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사고와 잘 헤어졌어요…이젠 ‘재밌다’는 말 듣고 싶어” [서믿음의 책담] 사진제공=이지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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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2000년 7월 30일. 스물세 살 이지선은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었다. 음주운전자가 낸 추돌사고 때문이다. 의료진은 난색을 표했으나 구사일생했다. 7개월간 입원하며 수술만 마흔 번 이상 받았다.


사고를 ‘만나고’ 20여년이 흘렀다. 이지선은 두 번째 인생을 에세이에 담았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문학동네).’ 성격은 2003년 출간한 ‘지선아 사랑해’와 판이하다. 20년 전에는 사고와 화해한 생존자였다. 지금은 절망과 잘 헤어진 생활인이다. 한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스스로 "귀여운 척해도 봐줄 만한 20대에서 점잖은 게 나아 보이는 40대 중반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다시 책을 쓰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지난달 26일 올림픽공원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살아남길 잘했다"며 웃었다. "측은하게 비춰지기보다 ‘어라 ~ 이 사람 생각보다 유머 있는데’라는 반응을 기대해요."


- 20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냈다.

▲‘지선아 사랑해’로 큰 사랑을 받았다. 홈페이지에 일기처럼 쓴 글이었다. 책으로 출간돼 관심 받는 과정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책에 담을 글들을 써내려갔다. ‘내가 이런 글을 쓰다니’라는 생각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반응이 폭발적이지 못해 아쉽지만 열심히 읽어주신 분들이 꽤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 삶을 다시 해석해서 올린 리뷰들을 읽을 때마다 재미있다.


- 첫 책을 냈을 때와 차이가 있다면.

▲‘지선아 사랑해’로 일상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눈물을 꽤 유발한 것 같더라. 너무 슬퍼서 완독하지 못하고 책을 덮은 분들이 꽤 있었다고 들었다. 사람들을 울리고 싶지 않다. 이번 책에서는 재미를 느끼셨으면 한다. 눈물 쏙 빼는 신파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나쁜 일과 헤어진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는….


-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란 제목이 인상적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아직 40대인데 웬 ‘엔딩’이냐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 삶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의도치 않게 일상에서 만난 반갑지 않은 일들이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이 되는 경우는 많으니까.


-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만났다’고 표현했다.

▲‘당했다’가 정확한 표현이지만, 사고 뒤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2년가량 지내니까 그 표현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당했다’고 말할 때마다 피해자로 정의되는 듯했다. 피해자로 살고 있지 않다. 마음속에 좋은 선물들도 가득하고. 당함의 결과는 잃음이지만 만남의 결과는 헤어짐이다. 몇몇 사람들이 (그 사고와 아픔에 관해) 조심스럽게 묻지만 저는 아무렇지 않다. 잘 소화돼서 괴롭거나 아프지 않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잘 헤어졌다.


- 외상 뒤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시쓰기’를 제안했다. 인생이 원한 대로 다시 쓰이고 있나.

▲모든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저와 제 주변에서 원하는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은 모든 상처가 회복되고 사고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텐데, 꼭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내 인생이 '꽤 괜찮은 해피엔딩'으로 향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다시쓰기는 내겐 상당히 신앙적인 해석이었다. 하나님께서 사고와 잘 헤어지고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피해자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신앙에 기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은데.

▲크게 어려운 점은 없다. 손이 약간 불편하지만 익숙해졌다. 대학 강단에 서는 일도 마찬가지고. 안식년(7년에 한 번씩 쉬는 해)을 기다리며 견디고 있다(웃음). 물론 저로 인해 가족이 희생하며 마음 졸인 시간은 상쇄할 수 없다. 그건 좀….


- 다시 쓰고 싶은 청사진이 있나.

▲유튜브 방송을 준비 중인데, 채널명 후보 1순위가 ‘이지고잉(easy going)’이다. 쉽게 가고 태평스럽고 편안하다는 의미다. 큰일을 겪었으니 강인하고 대단할 거라는 오해를 많이 하신다. 전 굉장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 장애와 더불어 인생 ‘다시 쓰기’에 성공한 롤모델로 부각되고 있다. 정치권에서 연락도 많이 온다고 들었다.

▲청년들의 좌절된 삶에 희망과 소망을 던져주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고오견’을 물을 때가 있다. 저의 특정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소모하고 싶은 의도도 있을 거다. 흔히 삶에 관한 엄청난 철학을 사색하거나 사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누군가 진지하게 물어볼 때면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 아닌데’라는 걸 들킬까봐 불안하다(웃음).


- 비교 행복에 관한 우려를 나타냈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상처에 관한 이해 부족으로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고.

▲누구나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 때문에 장애인과 친구나 이웃이 되는데 주저한다. 부지불식간에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걸 뛰어넘는 게 중요하다. 직접 경험하고 친구가 돼야 한다. 장애인을 분리하고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점을 숨기고 싶어 하는데, 장애인은 그게 드러나 있어서 손해를 보곤 한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게 중요하다. 당사자 역시 열린 마음으로 ‘모르니까 저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수많은 위로를 받았을 텐데 개인적으로 가장 힘이 된 따뜻한 말이나 행동은 무엇이었나.

▲잠깐이라도 (힘든 상황을) 잊게 해주는 거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고맙고 필요한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저를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좋았다. 친구들과 이모들이 생각난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린 아이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큰 위로가 됐다. 그런 분들께서 다시쓰기를 해주셨던 것 같다. ‘너는 환자가 아니야. 내 사랑하는 조카고 친구야’라고.


- "상처와 트라우마는 동전의 양면처럼 스트레스와 동시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연약한 존재구나’라는 깨달음 속에서 시간과 관계의 가치를 다시 알게 됐다.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행복을 느낀다. 우선순위가 정리된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린다. 그것을 나눠주며 새로운 에너지도 얻는다. 고통의 결과를 상쇄할 수는 없지만, 지속돼야 하는 인생이라면 그런 마음의 태도를 지녔으면 좋겠다. 좌절하지 맙시다(웃음).


이지선 “사고와 잘 헤어졌어요…이젠 ‘재밌다’는 말 듣고 싶어” [서믿음의 책담]

- 꼭 대단한 일이 아니라도, 나름의 인생 목표가 있을 것 같다.

▲너무 많은 도움이 저를 다시 살게 해줬다. 그런 역할의 소중함과 에너지를 알고 있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푸르미재단을 통해 발달장애가 있지만 경제활동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분들의 삶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해석하고 연구하며 증거기반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세움’이라고 수감된 부모를 둔 아이들을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어른들의 죄를 같이 받지 않고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고민하고 연구한다.


- 두 번째 책으로 다시 만났다. 앞으로 어떤 활동으로 만날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달이나 내달을 목표로 유튜브를 준비하고 있다. 영상으로 일상도 담고 에세이도 써보려고 한다. 외상 뒤 성장 과정에 있는 좋은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다. 구독자 3만 명이 목표다(웃음).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에 올라간 제 강연을 30만 명 정도가 봤더라. 그 10% 정도만 구독자가 모였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공감과 피드백이 있다면 올리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이지선 작가>


스물세 살에 교통사고를 만나 중화상을 입었다. 마흔 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이겨내고 ‘두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이화여자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현재 한동대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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