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동산 뉴스를 보고 아련한 추억에 잠긴 적이 있었다. 지난달 21일 서울 강남구 PH129(더펜트하우스 청담) 전용면적 273.96㎡ 6층의 임대차 계약이 보증금 4억 월세 4000만원에 체결되어 최고가 월세 기록을 갱신했다는 뉴스였다. 하루에 133만원이고 2년 월세를 합치면 9억6000만원이 된다. 필자는 왜 이 뉴스를 보고 추억에 잠겼을까? 그것도 아련하게?
어릴 때부터 바로 근처에 살았던 필자는 그 건물의 변천사를 잘 알고 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은 호텔이었다. 1992년에 ‘에메랄드 호텔’로 문을 열었다가 몇 년 뒤에 ‘엘루이 호텔’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텔은 별로 유명하지 않았지만,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은 정말 끝내줬다. 나이트클럽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90년대를 통 털어도 딱 한곳만 꼽으라면 고민 없이 선택할 최고의 클럽 ‘줄리아나 서울’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외로움이 싫어 모여드는 청춘남녀들로 인해 나이트클럽은 물론이고 인근 골목 곳곳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오렌지 족, 야타족 등등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재벌2세 등등이 와서 돈 자랑 인기 자랑 하는 모습도 종종 봤다. 화려하게 부풀었다가 IMF 이후 세기말의 분위기까지 겹쳐 몰락해버린 90년대식 유흥문화의 상징이었다.
21세기가 되자 나이트클럽은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했고 줄리아나 서울도 문을 닫았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호텔 대표는 호텔 객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주인도 찾는 이도 없이 쓸쓸하게 서 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필자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어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러나 부동산 불변의 진리는 이 건물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게 뭐냐고? 입지는 영원하다.
낡은 호텔은 몇 년 전에 재건축되어, 20세기의 영화를 재연하듯 매매가 100억이 넘고 월세 4000만원이 넘는 호화주택으로 변모했다. 언론에 공개된 입주민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일타강사 현우진, 영화배우 장동건 고소영 부부, 프로골퍼 박인비 등등과 함께 재계 거물들의 이름도 등장한다. 입주민들 중에 ‘줄리아나 서울’에 다녔던 사람들도 있을까? 그렇다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극적으로 변모한 건물로 치면 서초동의 주상복합 ‘아크로비스타’도 만만치 않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무너져버린 삼풍백화점 터에 다시 호화로운 주상복합 건물이 올라간 것만 해도 드라마틱한데 그곳에서 대통령이 나왔다. 입주민들이 내건 축하 현수막 아래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대통령 당선인을 보며 아득한 기분이 들었던 사람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쓰며 꼽아보니 필자가 살았던 아파트들도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어 공사판으로 바뀌었다. 공간이 사라져버리니 추억까지 부정당하는 것 같아 허전하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빨라도 너무 빨리 바뀐다. 지금도 한국건축사의 걸작이라는 남산 힐튼호텔 철거를 앞두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럽까지 갈 것도 없이 미국이나 일본에도 100년 넘은 호텔들이 많은데, 서울에서는 지은 지 아직 40년이 안 된 호텔도 철거 대상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는 이상 서울의 건축물은 단명이 숙명이다. 그러니 주변에 정든 건물이나 가게가 있다면 사진이라도 찍어 간직해두기를.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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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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