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용산(龍山)’이란 지명은 셀 수 없이 많다.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알려졌거나 왕이 행차했던 지역에 관례적으로 붙였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중 서울시 용산구의 지명은 그 유래가 최소 900년은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15대 임금인 숙종 연간인 1102년, 당시 풍수지리를 관장하던 관청인 서운관에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 일대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용산도 후보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 풍수학자들은 용산의 지세가 용의 머리와 닮아 궁궐이 들어설 만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풍수지리와 별개로 이미 용산은 그당시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용산은 남산의 지맥이 연결된 해발 90m 정도의 구릉지대로 북쪽의 한양과 남부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고려왕조가 1259년 몽골제국에 복속된 이후에는 오랫동안 몽골군이 주둔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고려와 일본 원정을 준비하던 몽골군은 경북 안동 일대에 사령부를 만들고 개성에서 안동으로 이동하는 물자를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기지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고려의 왕들도 용산으로 행차해 몽골군 장수들과 만났던 모양이다. 고려 27대 왕인 충숙왕이 왕비인 조국장공주와 용산 일대에 머물다가 왕자를 출산했다고 하는데, 해당 왕자는 ‘용산원자(龍山元子)’라 불렸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왕자까지 태어나면서 민간에서도 이 지역은 ‘용이 태어난 자리’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후 용산이 다시 한국 역사의 주요 지역으로 등장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였다. 당시 임오군란 제압을 빌미로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이후 일제의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일제강점기 오욕의 역사가 새겨졌다. 일제의 조선총독과 조선주차군 사령관의 관저도 모두 용산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일제 패망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됐다.
한반도에 유입된 외국군들이 모두 용산에 주둔했던 이유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목줄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용산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가 집결하던 관청인 군자감이 위치해 군량미가 모두 집결하는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청군은 물론, 일제도 주둔군 기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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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영욕의 역사를 딛고 용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 정치의 중심지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권피탈과 외국군 주둔의 아픈 역사를 뛰어넘어 한국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 땅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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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용산의 유래](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2032114265086331_164784041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