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m 육박하는 6~8차선 횡단보도
거동 힘든 노인들에겐 부담되는 거리
국내 노인 보행 속도, 하위 25%는 0.545m/s
부지런히 걸어도 긴 횡단보도 완주 힘들어
보행 속도가 느린 노인에게 6~8차선 도로에 놓인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쉽지 않다. 횡단보도 거리에 비해 신호등 파란불 유지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사진=임주형 기자 skepped@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15일 서울 강서구 한 6차선 도로.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지자마자 한 무리의 노인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발이 인도에 닿기가 무섭게 신호등은 곧장 빨간불로 바뀌고, 수십대의 차량들이 쏜살같이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현대인이라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횡단보도지만, 노인들은 가끔 길을 건너는 게 버겁게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이른 아침 병원을 들렀다가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60대 최모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관절도 안 좋아지고 걸음걸이도 느려지는데 도로는 넓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며 "가끔 길을 건널 때 조바심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긴 횡단보도에 부담감을 느끼는 노인들이 있다. 6~8차선 도로에 설치된 횡단보도의 총 거리는 약 20m에 육박하는데, 신호등 파란불 유지시간은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반인보다 거동이 불편한 '보행약자'를 고려한 횡단보도 설계에 나설 방침이다.
◆고령자에겐 너무 먼 횡단보도
이날 '아시아경제'가 찾은 서울 시내 한 횡단보도는 병원 시설이 밀집돼 노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두 발로 걷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있었고, 전동 휠체어나 유모차에 몸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노인들은 모두 횡단보도의 거리에 부담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70대 A씨는 "젊은 사람들이야 별 생각 없겠지만, 이 나이가 되면 사소한 것들도 다 부담이 된다"며 "횡단보도 건너는 것도 가끔은 무서워 죽겠다. 행동이 원체 굼뜨니까 건너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으면 주변 눈치도 보게 된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 부모를 모시고 횡단보도를 걷는 게 불편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50대 B씨는 "나 혼자 걷는 것은 아무 상관 없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을 때마다 횡단보도 건너는 게 큰일이다"라며 "휠체어를 타는 건 싫어하시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보행 약자' 노인 고려 못 한 파란불 유지 시간
노인 입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현행 도로교통법을 보면, 도로 차선은 3m 규격에 맞춰 설치해야 한다. 인도가 있는 도로의 경우 도로 앞에 0.5m의 경계선을 둔다.
이 기준에 따라 노인들이 건너는 횡단보도의 거리를 어림잡아봤다. 6차선 도로는 각 차선당 폭이 3m이므로 모두 합쳐 18m다. 여기에 더해 횡단보도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인도와 도로 사이 경계선을 각각 0.5m로 잡으면, 횡단보도 거리는 총 19m다.
신호등의 파란불 유지시간은 통상 '보행 진입 시간'과 '횡단보도 보행 시간'으로 나뉜다. 보행 진입 시간은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일괄적으로 7초 주어진다. 횡단보도 보행 시간은 모든 보행자가 직접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으로, 신호등 불이 깜박이는 시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횡단보도의 경우, 보행 시간은 25초로 할당됐고 진입 시간(7초)과 합치면 도합 32초였다.
현재 국내에선 일반 성인의 보행 속도를 1m/s, 고령층은 0.8m/s로 규정하고 있다. 성인은 32초간 32m를, 노인은 25.6m를 갈 수 있으니 상당한 여유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기준이 모든 노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행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관절이나 근육 등의 문제로 걸음 속도가 느린 '보행약자' 노인도 많다.
실제 지난 2018년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와 카이스트 연구팀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여성 노인 중 하위 25%의 보행 속도는 0.545m/s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신호등 파란불이 켜진 32초 동안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17m 남짓한 거리밖에 가지 못한다.
◆국내 보행 중 사망한 노인, OECD 평균보다 3배 이상 높아
보행약자 노인이 길을 건너다 갑자기 신호등이 바뀌어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다. 지난 4일 유튜브 채널 '맨인블박'에 올라온 한 영상을 보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갑자기 신호등 불이 적색으로 바뀐다. 당시 운전자들은 비상 점멸등을 켜 노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줬지만, 만일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차량이 있었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다.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노인 비율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지난 7일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2016년 50.5%에서 지난해 57.5%로, 최근 5년간 점진적으로 증가해 왔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하는 '노인 인구 10만명 당 보행 중 사망자 수' 통계에서도, 가장 최근인 지난 2018년 기준 한국은 11.4명을 기록해 압도적 1위로 나타났다. 2위인 칠레(8.1명)보다 3.3명이나 더 많았고, 회원국 평균(2.9명)과 비교하면 3배를 훨씬 넘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고령자를 배려한 신호등·횡단보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새로운 도로설계 지침을 마련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월부터 3월까지 약 1달 동안 '사람 중심 도로 설계지침 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이 지침은 고령자를 위한 보행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아울러 휠체어 이용자·시각장애인 등 보행 취약자를 고려한 보행 환경을 제공하는 게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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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령자를 위해 바닥형 보행신호등, 횡단보도 대기쉼터를 설치하고, 느린 보행속도로 인해 횡단 시간 부족이 예상되는 만큼 긴 횡단보도 중간에는 '중앙보행섬'을 설치하게 한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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