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참여자 이마에 '서경역적' 글자 새겨 섬 유배
과거와 달리 요즘은 문신(文身)한 젊은이를 흔히 볼 수 있다. 문신은 영어로 타투(Tatto)라고 하는데 남태평양 타히티족의 말인 타토우(Tottow)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갗에 상처를 내거나 바늘로 찔러 물감이나 먹물로 글씨, 그림, 무늬 등을 새기는 것이다. 한자로는 입묵(入墨), 자청(刺靑), 경면, 자자(刺字)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문신은 전근대시기 형벌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中은나라 육체에 직접 형벌 중 하나
당나라 말기 탈영병 이탈 막으려 활용
일찍이 중국에는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이라는 형벌 체계가 있었다. 이른바 오형(五刑)이다. 중국의 오형 체계 이전에는 육형(肉刑)이 있었다. 육체에 직접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거세, 발 자르기, 코 베기, 문신, 사형이다. 다섯 가지 형벌 모두 중형에 해당한다. 육형은 중국 은(殷)부터 시작되어 한(漢) 초기까지 시행되었으나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져 거의 폐지되었다. 대신 태, 장, 도, 유, 사 오형 체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157년 한 문제(文帝)가 육형을 폐지하면서 죄인에 대한 문신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당(唐) 말기가 되면 문신이 다시 등장한다. 당을 이은 송(宋) 시기에 문신에 대한 법규가 구체화된다. 이후 요(遼), 원(元), 명(明), 청(淸)까지 문신형은 지속되었다. 문신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1905년의 일이다.
한 초기에 폐지되었던 문신이 새롭게 활성화된 때는 당 말기 황소(黃巢)의 난 이후다. 전란 속에서 강제 징집된 병사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문신을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얼굴에 부대명을 새겼다. 이후 죄인을 대상으로 얼굴에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고, 송이 들어서면서 국가의 공식 형벌 체계로 제도화되었다.
군율(軍律)은 군대와 군인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군율은 전투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기에 독특한 성향을 띠게 마련이다. 전근대 시기 절대 다수의 군인은 강제 징집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군대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군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시간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효과를 극대화해야만 했다. 군율에 머리를 베는 참수형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병영에서 탈영하면 참수형을 받았다. 탈영으로 참수하기 전에 병사들의 얼굴에 부대명을 새겨 미연에 도망 자체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남송(南宋) 시기가 되면 강남지역의 개발과 무역의 활성화로 경제가 크게 발전한다. 이와 더불어 경제 활동과 관련된 범죄 유형도 다양화된다. 문신형을 받는 대상자가 크게 늘어났고, 또 황제의 사면령(赦免令)으로 많이 풀려나기도 했다. 문신한 자들이 일상 생활에 복귀하면서 문신의 낙인 효과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비리를 저질렀던 관리나 서리(胥吏)들이 다시 활동했다. 오히려 이 시기 백성들 사이에는 문신이 유행하기도 한다. 남송 시기 전문적으로 문신을 해주는 장인을 침필장(針筆匠)이라 불렀다. 송 초기 문신형을 새롭게 부활시킨 입법 취지는 점차 무색해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삼국지 동이전' 등에 등장
고려시대 들어 일반인들도 문신 새겨
1136년 전후 하나의 형벌로 자리매김
우리나라 고대에도 문신에 관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국 사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그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고, ‘변진조(弁辰條)’에는 "남자든 여자든 간에 모두 왜인들에 가깝게 또 문신을 새긴다"라고 되어 있다. 남쪽 경계가 왜와 가까워 몸에 문신을 했다고 한다. ‘왜인조(倭人條)’에는 왜의 문신 풍습이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왜국의 남자는 어른이든 어린이든 간에 모두 얼굴이나 몸에 먹물을 넣어서 문신을 만든다. 왜의 수인(水人)들은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 전복, 조개를 잡는데, 문신을 새기는 것 또한 큰 물고기나 물새가 싫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에 와서 차츰 장식으로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대에 왜의 영향을 받아 행하던 문신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중국 송의 문신형 공식화 시기와 맞물린다. 1123년 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방문하고 난 후 작성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이마에 그림을 새기고 양반다리를 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고려에서 전반적인 풍속은 아닐지라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기록에서 풍속이 아니라 형벌로서 문신이 확인되는 것은 묘청(妙淸)의 난 전후다. 1135년 1월 묘청은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세력은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차단하고 고려 서북 지역을 장악했다. 고려 조정은 김부식을 반란 진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진압군은 서경성(평양성)을 포위하고 1136년 2월 총공격을 감행해 반란을 종식시켰다.
반란 주동자들은 참수되어 3일간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생포된 자들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 중에 가장 강하게 항거한 자는 ‘서경역적(西京逆賊)’이라는 네 글자를 이마에 새겨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서경(西京)’ 두 글자를 새겨 향(鄕)과 부곡(部曲)으로 보냈다. 묘청의 난을 거치면서 고려 사회에 형벌로서 문신이 공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충상호형' 피지배계층으로 추락 의미
충선왕 사면대상서도 제외된 중죄
고려의 율령은 중국의 율령을 모방하는 동시에 고려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기도 한다. 1185년 8월 남원군(南原郡)의 어떤 사람이 군리(郡吏)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루는 군리의 집으로 찾아가 군리를 기둥에 묶고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결국 군리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은 고려 국왕에게 보고되었고, 신하들은 투살죄(鬪殺罪)로 처벌하도록 건의했다. 국왕은 "그 죄상(罪狀)에 의거하여 마땅히 얼굴에 자자(刺字)하고 충상호형(充常戶刑)에 처하라"고 명했다.
사료상 군리를 불태워 죽인 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군리를 죽일 만큼 권세를 가진 자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충상호형’은 보통의 호(戶)에 충당한다는 의미로 중국의 율령과는 차이를 보인다. 문신을 새기고 ‘충상호형’에 처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권세를 가진 귀족임에 분명하다. ‘충상호형’에 처해지는 것은 지배계층에서 피지배계층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들의 자손은 과거(科擧) 응시와 국학(國學) 입학에서 제외되었다. 쉽게 말해 신분 형벌이었던 것이다.
참수형과 교수형을 제외한 유배된 자들은 국왕의 사면(赦免)에 따라 일정한 단계를 거쳐 상경(上京)할 수 있었다. 섬으로 유배가는 배도(配島), 육지로 나오는 출륙(出陸),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歸鄕), 서울로 올라오는 상경(上京)의 단계를 거쳤다. 상경하면 국왕을 배알하고 서용(敍用)될 수 있었다. 이들이 유배되어 있을 경우 지배계층에서 배제된 것일 뿐 유배된 지역의 주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충상호형’에 처해졌더라도 지배계층에서 피지배계층으로 완전히 전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관인(官人)의 경우 신분 자격이 정지된다는 개념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1298년 1월 충선왕(忠宣王)은 교서(敎書)를 내려 사면령을 반포했다. 참수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를 모두 사면하고, 섬으로 유배된 자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그 가운데 국가 반란을 모의한 자, 불충하고 불효한 자, 살인과 강도한 자, 얼굴에 문신하고 상호(常戶)에 충당된 자는 제외했다. 그만큼 얼굴에 문신한 것 자체가 중범죄자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려의 경우 잦은 외침과 대외 원정을 반복했다. 그렇기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군법을 어기거나 반역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도망병도 속출했다. 이러한 인력 손실을 막고자 마련한 것이 군율이다. 군율에서 가장 극형인 사형은 역설적이게도 노동력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다. 이에 고려시대에는 장정들의 노동력을 보존할 수 있는 사형 바로 밑 단계인 문신형이 선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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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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