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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성난 가시 대신 초록 잎사귀…40년 한국살이 편안한가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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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무 생존의 비밀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성난 가시 대신 초록 잎사귀…40년 한국살이 편안한가보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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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처음 생명을 일으킨 건 나무다. 45억년 전 만들어진 지구의 경우 생명은 처음에 바닷속에서 태어났다. 30억년 전이다. 고작 25만년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로서는 체감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거대한 시간이 적막하게 흐르고 드디어 4억년 전 생명은 뭍으로 장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식물 형태로 올라온 생명체들은 이 땅의 뭇 생명체가 움틀 바탕이 됐다.


지금 이 땅의 모든 나무에는 4억년 생명 진화의 원초적 흔적이 남아 있다. 나무 관찰은 그래서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애면글면 이어온 생존 전략의 역사를 짚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무의 여러 조직 가운데 여느 생물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지어낸 특별한 조직이 있다. 가시다. 가시는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로 몸체의 일부를 변화시킨 결과다. 가시를 돋운 거개의 나무는 무엇보다 먹을거리로 유용하기 십상이다. 초식동물의 좋은 먹잇감인 맛있는 잎과 여린 가지를 가진 나무들이 짐승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억센 가시로 짐승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무들이 스스로 터득해낸 생존 전략이다.


두릅나무과의 음나무도 그런 나무다. 음나무 가지의 새순을 사람들은 ‘개두릅’이라고 부르며 즐겨 먹는다. 삶아서 초장에 찍어 먹거나 튀겨먹기도 하며, 연한 잎을 잘 말려 차로 우려내 먹기도 한다. 더 요긴한 것은 ‘닭백숙’을 고아낼 때 쓰이는 줄기 껍질이다. 음나무의 연한 가지를 넣어 고아낸 닭백숙은 맛이 고소하고 담백하며 관절염과 요통에 일정한 효능도 있다. 흔히 ‘엄나무 백숙’이라고 부르지만 나무 이름은 음나무다.


짐승들에게도 음나무 새순과 연한 가지는 좋은 먹을거리다. 하릴없이 음나무는 채 자라기도 전에 잎은 물론 줄기와 가지가 꺾이는 수난을 맞게 된다. 그러자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가시를 사납게 돋워냈다. 사람과 초식동물의 접근을 막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식물 몸체 전체에 돋아나는 가시는 음나무의 뚜렷한 특징이지만 크게 자란 음나무에서는 가시를 찾을 수 없다. 흥미롭다. 초식동물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체가 커지면 음나무는 가시부터 덜어낸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줄기가 굵어지고 키도 커지면 가시가 아니라도 스스로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에너지까지 소비해가면서 잎·가지·줄기껍질을 가시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시를 돋웠던 한 그루의 나무가 생존의 위협이 사라진 생육환경에 처했을 때 서서히 달라지는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마치 나무가 고도의 지능으로 주변 환경의 상태를 관찰하고 이에 대응 전략을 지혜롭게 구상하는 듯 신비롭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성난 가시 대신 초록 잎사귀…40년 한국살이 편안한가보오 카스피주엽나무의 전체 모습.


이란 사막지역서 자생하는 카스피주엽나무
1970년대 천리포수목원 들여와 키워
낙타 입 닿는곳까지 억센 가시로 중무장
40년간 먹힐 위협 없자 초록 잎사귀 돋아나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에는 1970년대 들여와 지금까지 공들여 키우는 한 그루의 특별한 나무가 있다. 이란의 사막 지역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처음 들어올 때 ‘이란주엽나무’라고 불렀지만 최근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카스피주엽나무’를 추천명으로 정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카스피주엽나무도 음나무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억센 가시로 중무장하고 사막 지대에서 살았다. 콩과에 속하는 이 나무는 우리가 ‘주엽나무’로 부르는 나무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주엽나무도 줄기와 가지에 고약한 가시를 달지만 카스피주엽나무의 가시는 유난히 고약하다.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성난 가시가 줄기와 가지 전체에 무성하다.


가시는 밑동에서부터 줄기를 타고 나뭇가지 전체로 퍼져 있다. 먹이를 찾기 어려운 사막에서 카스피주엽나무의 여린 가지와 잎은 사막 풍경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낙타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다. 사막에서 나무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하는 건 낙타의 공격이다. 결국 나무는 낙타가 다가서지 못하도록 가시를 돋아냈다. 가시가 아니라면 낙타는 잎사귀에서부터 어린 가지까지 마구잡이로 먹어치울 것이다. 광합성으로 양분을 지어내 스스로 키워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살아남는 일이었다. 잎보다 가시를 먼저 낸 것이다. 낙타가 좋아하는 잎과 가지를 가진 나무로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토록 무성한 가시는 일정한 높이부터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아래쪽과 위쪽이 전혀 다른 나무인 것처럼 착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 높이가 자로 잰 듯 수평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경계 부분은 웬만한 크기의 낙타가 긴 목을 뻗었을 때 닿는 주둥아리 높이다.


낙타의 입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시를 낼 필요는 없다. 낙타의 주둥아리가 닿지 않는 자리까지 가시를 지어내는 건 낭비다. 가시가 아니라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잎을 하나라도 더 돋아내야 한다. 나이 든 음나무의 줄기가 모든 가시를 덜어내고 미끈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무는 오랜 경험으로 낙타의 키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 높이까지만 가시를 돋운 것이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성난 가시 대신 초록 잎사귀…40년 한국살이 편안한가보오 낙타의 주둥아리 높이까지 무성하게 돋워낸 카스피주엽나무의 사나운 가시.


찰스 다윈 책 '식물의 운동력'서 생존비밀 연구
나무 기억력·판단력, 동물수준 인텔리전스 있어

독특한 가시 덕에 카스피주엽나무는 천리포수목원의 명물이 됐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 잡고 40년쯤 지난 2010년께부터 나무는 놀라운 현상을 연출했다. 가시가 무성하게 돋았던 자리에서 난데없이 초록의 잎사귀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낙타의 공격을 막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가시를 내지 않아도 된다. 나무는 이를 정확하게 알아챘다.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과다. 낙타의 공격이 없는 수목원에서 사람들로부터 보호받으며 40년쯤 살아보니 가시를 낼 필요가 사라졌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카스피주엽나무는 어떻게 알았을까. 확실한 근거를 찾아야 한다. ‘나무가 지난 40년 동안 살아온 과정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무에게 기억력이 있나? 기억력이 없다면 어딘가에 기록하고 일일이 확인한다는 말인가.


질문은 이어진다. 40년 동안 살아온 과정을 모두 기억한다치고, 그동안 낙타의 공격이 없었으니 나무는 앞으로도 낙타가 찾아올 리 없다는 판단까지 했다. 대관절 이 놀라운 기억과 판단 능력은 어디서 온 걸까. 기억력과 판단력은 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뇌가 없는 나무는 어떻게 기억하고 그 비밀스러운 기억을 바탕으로 어떻게 현명하게 판단했을까.


사실 이 질문을 처음 던진 사람은 찰스 다윈(1809~1882)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1859)’을 완성한 뒤 식물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말년에 아들과 공저로 펴낸 ‘식물의 운동력(The Power of Movement in Plants·1880)’이라는 책이 있다. 이 역저는 뇌가 없는 식물이 생존 과정에서 보여주는 놀랍도록 지혜로운 힘의 원천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생명의 비밀을 탐구해온 다윈은 궁금했다. 식물의 살림살이는 매우 지능적인 듯한데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윈은 다양하게 실험했다. 오랜 실험과 연구 끝에 다윈은 이 책의 결론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식물에도 하등동물 수준 이상의 인텔리전스가 있다." 그는 뇌를 근원으로 하는 ‘지능’이 아니라 ‘인텔리전스’라고 표현했다. 굳이 번역하자면 ‘지성’이라고 할 만한 능력을 식물에 부여했다. 뇌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뇌의 활동으로 알려진 지능에 버금가는 능력이 분명하게 있다는 걸 에둘러 포현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돋워낸 가시에 대한 기억을 지닌 채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더 평화롭고 풍성한 지금의 살림살이도 운영하는 나무의 기억력과 판단력이 생각할수록 놀랍다. ‘지능’에 못지 않은 ‘지성’. 호모 사피엔스 곁에서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오래 살아가는 나무의 생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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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칼럼니스트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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