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인에게 '폐족(廢族)'은 두려운 단어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정치 공학적 사고에 익숙한 여의도 정가 사람에게는 혼란으로 다가올 철학적 물음이다.
'폐족 선언'이 두려움의 단어인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으로 자신을 던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반성의 시간'을 채웠다는 국민적 평가를 받는다면 회생의 기회를 얻겠지만, 국민의 외면이라는 늪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폐족이라는 단어가 다시 여의도 정가의 관심 키워드로 등장한 것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의 과오(過誤)를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소신을 드러내자 당은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전직 대통령의 정치 철학을 계승한 정치인들은 "말도 안 된다"면서 펄쩍 뛰고 있다. 한쪽에서는 당의 미래를 위해 '신(新) 폐족 선언'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폐족의 사전적 의미는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족속이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권력을 지녀야 하는데 벼슬을 할 수 없다니 얼마나 막막한 상황인가. 폐족이 한국 정치 역사에 각인된 시기는 2007년 대선 직후다.
당시 집권 세력의 신세는 난파선과 같았다.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500만표 이상 뒤처진 대패를 당하면서 지지 기반이 붕괴했다. 특히 청와대와 여당의 주축을 이루던 친노(친노무현) 세력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폐족 선언이 나온 것도 바로 그때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린 안희정 참여정부 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은 2007년 12월26일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을 통해 친노 세력을 폐족이라고 표현했다.
"친노(親盧)라고 표현돼온 우리는 폐족(廢族)이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다. 우리는 실컷 울 여유가 없다." 대선 패배와 관련해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는 자책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폐족 선언은 사전적 의미처럼 벼슬(공직자의 꿈)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지자는 권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여정부 평가포럼이 해체를 선언할 무렵 친노 세력은 재단법인 '광장' 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폐족의 일원이던 정치인 상당수는 '정계 은퇴'보다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꿨다.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있을 때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자신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고 생각하니 세상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런 태도 때문에 국민의 외면을 받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니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도 그 때문일까. 폐족 선언 이후 친노 세력에게 다시 집권의 기회가 부여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다시 얻는 과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국민의힘이 교훈을 얻어야 할 지점이다. 또 다른 버전의 폐족 선언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앞서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힘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을까. 국민이 마음을 열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생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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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이 그러하다면 전직 대통령 과오에 대한 사죄는 당을 옥죄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기다림의 시간은 결국 국민의힘에 달렸다. 일회성 '정치 퍼포먼스'에 그친다면 선거에서의 반사이익은커녕 '긁어 부스럼'의 후폭풍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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