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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 민주화운동은 남자만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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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남산 딸깍발이] 민주화운동은 남자만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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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층의 어느 조사실. 손발은 끈으로 묶이고 얼굴은 망으로 가려진 한 사람이 좁고 어두운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 테이블에 두꺼운 조서와 고문 도구로 추정되는 물체들이 놓여 있다. 검은색 계통의 점퍼를 입은 남자 예닐곱 명이 그의 주위에 서 있다.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그리고 그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분명 남자의 얼굴일 것이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은 이처럼 당연시되는 상상력에 대한 문제 제기다.


◆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의에 은폐되어 온 여성의 피와 땀, 희생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국가보안법에 맞선 투쟁과 궤를 같이 해왔다. 이 신성한 투쟁의 현장에 분명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기록과 기억에는 없다. 여성들도 목소리를 내고 피와 땀을 흘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은 남성이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상징자본을 독점한 것은 남성이었다.


"여전히 남성중심주의가 강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그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운동 내에서 아직도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 여성의 자리는 비어 있거나 생략되기 일쑤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나 아들을 옥바라지하고 이들의 석방운동에 나선 여성들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금돼 고강도 조사를 받다 유산한 여성도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들의 아픔과 희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세대가 '386'이라는 이름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고 오늘날 '586' 기득권층이 된 이 순간도 그렇다.


딸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왜 저런 사람들처럼 되지 못했어?"


젊을 적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청와대도 가고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 배지도 다는데, 왜 엄마는 그냥 '아줌마'냐는 것이다. 엄마는 할 얘기가 없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면서 20대까지 '나'라는 사람이 쌓아온 시간·정체성·역사·이야기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뿐.


간혹 모습을 드러낼 수 있던 여성조차 누군가에 의해 서술되고 동원되고 자리매김됐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은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주변화되고 만 여성, 수동적 존재로만 그려진 여성성을 해체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이젠 여자들이 말해야 한다"는 믿음과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여자들의 목소리가 안 들렸잖아요. 여자들의 목소리가 울타리를 넘으면 안 되고 암탉이 울면 집 안이 망한다는 소리를 우리에게 했잖아요. 이제 여자들이 말할 차례고 여자들이 말할 시대예요."


[남산 딸깍발이] 민주화운동은 남자만 했나요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층 10호 조사실. 원형이 보존된 9호실과 달리 욕조가 철거되고 내부 구조가 변형된 모습. <사진=연합뉴스>


◆ 국가보안법이라는 비극, 그리고 희극

이들의 용기와 목소리는 비극으로만 소환되는 국가보안법이 일종의 희극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아저씨, 저 생리 터졌어요." 고문받던 조사실에서 여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수사관이 생리대와 팬티를 사왔다. 수사관은 동료들에게 "내가 생전에 여자 생리대하고 팬티를 사본 적이 없는데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느냐"고 떠벌렸다. 여자가 말했다. "아저씨는 왜 사람 고문하는 일을 하세요? 직업을 바꾸시죠." 수사관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여자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여자는 먼 훗날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목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방송에 그의 얼굴이 나왔다.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 수사관…. 고문하고, 팬티를 사주고, 그 사실까지 떠벌리고 다닌 그 남자는 어느덧 민주화시대에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희극은 끝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인권변호사가 2명이나 대통령이 된 나라다. 도대체 언제적 국가보안법이냐는 물음이 나올 법도 하다.


2020년 지난 5월 대법원은 '혁명동지가'를 부른 옛 통합진보당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2012년 6월21일 통합진보당 행사에서 '혁명동지가'를 제창하고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혐의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접수 건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120건, 이듬해 144건으로 늘었다 지난해 305건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받은 이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그러나 개혁의 칼날이 국가보안법으로는 향하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1대 총선에서 범여권은 180석 확보라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입을 닫고 있다. 참여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섰다가 정권 몰락을 자초했다는 점이 트라우마로 남은 듯하다.


여권은 심지어 '제2의 국가보안법'으로 불리는 테러방지법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지금 여당이 야당이던 시절 필리버스터(filibuster·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어떻게든 저지하려 들었던 바로 그 '악법' 말이다.


[남산 딸깍발이] 민주화운동은 남자만 했나요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외관 모습. 고문과 취조가 이뤄지던 청사 5층의 좁은 창문이 눈에 띈다.


국가보안법이 단순한 하나의 법률에 그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분단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은 북한이 현존하는 한 그 자체가 하나의 체제로 작동한다. 단순히 선거 결과로, 정부·여당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다만 화두를 제시하고 공론을 모으는 작업은 당장 시작해도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다양한 사회·문화적 접근과 성찰에 바탕해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담론을 재구성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이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젠 여자들이 말해야 돼요. 여자들의 말하기는 저항이고 투쟁이에요."



(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 홍세미·이호연 외 3명 /오월의봄 1만8000원 )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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