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18세기 조선의 수도 한양은 폭증하는 인구로 인한 다양한 도시문제에 봉착한다. 특히 한양의 상하수도 역할을 하는 청계천은 몰려드는 빈민들의 점거와 도시 쓰레기 등으로 면적이 줄어들면서 전염병과 홍수의 온상이 됐다. 당시 법령은 도로나 축성 등의 공사를 인근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부역을 통해 해결하게 돼 있었으나, 청계천의 상황은 이미 지역에서 감당할 수 없는 대공사를 요했다. 이에 임금인 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직접 나가 백성의 의견을 청취했다. 준천의 필요성은 확인했지만, 대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일은 다른 문제였다. 영조는 차근차근 여론형성을 위한 소통에 나섰다. 1754년 3월 청계천 인근 지역 주민 대표들을 궁으로 모아 준천공사에 대한 여론조사와 토론을 벌였고, 그해 과거시험엔 ‘청계천 공사의 장단점을 기술하라’는 문제를 직접 출제했다. 끝없이 백성들과 대화하고 여론을 만들기 위한 소통을 멈추지 않았던 영조의 노력은 마침내 1760년 2월 18일 청계천 공사가 시작되며 결실을 보았다. 청계천 준천사업의 필요성을 이해한 백성들은 한양 인근은 물론 멀리 제주도에서도 올라와 대공사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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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소는 ‘불타는 소통’의 줄임말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의 채팅창이나 메신저, 또는 댓글 등을 통해 상호 활발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칭한다. 청계천 준천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영조는 이 밖에도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불소’를 통해 시도했다. 당대 사회를 흔든 양역(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 문제를 두고 창경궁 홍화문에 직접 나가 백성과 유생들의 의견을 주밀히 청취했는가 하면 아예 백성의 민심을 본격적으로 듣기 위해 연산군 때 폐지된 신문고를 부활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52년의 재위기간 중 30여 차례 이상 궁궐 밖에 나가 백성들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확인된다. 어진 군주 영조의 불타는 소통은 이후 공감의 정치로 승화돼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됐다.
용례
B: 나는 안 보는데 부모님이 보셔서 같이 봤지.
A: 오~ 너는 누구 응원해? 나는 영탁이 원픽인데.
B: 나는 무대 보니까 이찬원이 끌리던데, 엄마는 임영웅 응원하고 아빠는 김호중 좋아하시더라고. 응원 문자 보내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람 영업하느라 온 가족이 머리 맞대고 완전 토론 했다니까.
A: ㅋㅋㅋ 완전 미스터 트롯 덕에 불소에 가족 대통합을 이뤘구나!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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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사전] 불소 - 불타는 소통](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0031815383028867_158451351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