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30년史
[아시아경제 유제훈 기자] "대우그룹 해체로 대한민국에 '대마불사(大馬不死)'란 신화는 무너졌다."
고(故) 김우중 회장과 30여년을 함께한 대우그룹을 두고 세간에서는 한국경제 고도 압축성장기를 대표했던 기업이란 평가를 내놓는다. 샐러리맨 출신의 김 전 회장이 입지전적으로 쌓아 올린 대우그룹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재계 2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건 대기업으로 올라섰지만, 고도성장기 누적됐던 각종 부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창립자보다 먼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9일 타계한 김 전 회장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닮은꼴이다.
◆'샐러리맨 신화'의 원조…M&A로 덩치 불려 = 대우그룹의 출발은 1967년 설립된 '대우실업(현 포스코인터네셔널)'이다. 직원 5명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고인의 탁월한 사업수완, 정부의 수출주도산업화 정책을 통해 대형 종합상사로 급성장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트리코트(tricotㆍ메리야스 편물의 일종) 원단과 와이셔츠를 수출하던 대우실업은 첫 해부터 58만 달러의 실적을 내더니, 2년 만에 국내기업으로선 첫 해외 지사(호주)를 설립하는데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후 대우그룹은 인수ㆍ합병(M&A)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1973년 영진토건ㆍ동양증권을 시작으로 한국기계(1976년),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1978년), 새한자동차(1978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1982년) 등을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 기업은 대우그룹이 해체 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각기 대우건설, 미래에셋대우, 두산인프라코어, 대우조선해양, 한국GM, 위니아대우로 업계 수위권을 다투는 대기업으로 현존해 있다.
◆세계경영 기치로 재계 2위 승승장구 = '세계경영'. 이는 1990년대 대우그룹 성장을 압축한 단어다. 김 전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1989년)'가 상징하듯 대우그룹은 1993년 세계경영을 선언하고 막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무주공산이던 동구권에 진출했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기업 GM과 경쟁해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것은 대우그룹의 세계경영을 상징하는 일화로 꼽힌다.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등 동구권 일부에선 파산한 지 20년이 지난 '대우' 란 브랜드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정도다.
국내적으로도 확장은 거듭됐다. 본격적 남북교류가 시작되기도 전인 1995년엔 대북경제협력사업에 손을 뻗었고, 외환위기가 목전에 닥친 1997년엔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같은 공격적 경영의 결과로 대우그룹은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삼성ㆍLG그룹 등을 제치고 재계 순위 2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신화가 정점에 이르던 순간이었다.
◆차입의존경영의 한계…大馬不死 신화의 붕괴 = 하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대우그룹의 신화에도 서서히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도성장기 대규모 차입에 의존, 사세를 불려온 대우그룹의 성장 전략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며 해외 채권자들이 상환 압박을 시작하자 급속히 유동성 위기로 빠져 들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김 전 회장은 구조조정론 대신 '500억 달러 무역흑자론'을 내세워 돌파를 시도했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대우자동차-GM 합작,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 등 자금 확보를 위한 대우그룹의 전략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면서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대부분의 계열사가 워크아웃 상태에 돌입,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다. 이듬해엔 수 십 조원에 이르는 분식회계가 적발되면서 대우그룹은 창립 30여년만에 공중 분해됐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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